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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정태가 소리내다

이재명 헬기 논란…특권의식이 시민의 직업윤리 묵살했다

중앙일보

입력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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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로 피습 당한 이재명 대표가 헬기로 부산대 병원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이동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그래픽=김지윤 기자

흉기로 피습 당한 이재명 대표가 헬기로 부산대 병원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이동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그래픽=김지윤 기자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후보 시절 ‘차별 없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공평한 나라를 만드는 기본이다. 무턱대고 대학병원을 찾고 우왕좌왕 옮겨 다니면 비용도 들고 치료 시기도 놓친다’고 말했다. 부산대 국가지정 외상센터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센터이므로 이 대표는 부산대에서 수술을 받는 게 본인의 말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는 습관에 밴 특권 의식에서 나온 진료 패스트트랙이고 수술 새치기이다. 이런 정치인들의 행태는 의료진에 대한 부당한 갑질과 특혜 요구이고, 진료 방해 행위이고 국민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공정하지 않은 일이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등이 지난 8일 서울중앙지검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민주당 천준호·정청래 의원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사건의 맥락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난 2일 이재명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 예정지에서 피습을 당한 후 부산대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에서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은 후 119 응급헬기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향한 사건의 후폭풍이 지금까지 몰아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이 피습을 당하면 여야 할 것 없이 그 해당 정치인에게 우호적인 동정의 시선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의료계 당사자들의 시선이 몹시 차가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국민 여론마저도 이 대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 폭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 대표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단지 우리 국민의 감정적 심기를 거스른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현재 품고 있는 다양한 모순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점부터 이야기해보자. 이 사건은 지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지역 균형 개발을 약속하며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을 채워주기 바쁘다. 그런데 막상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청래 의원은 “목은 민감한 부분이라 후유증을 고려해 (수술을) 잘하는 곳에서 해야 한다”며 이 대표의 서울행을 정당화했다.

중화학 공업의 비중이 높은 영남권의 특성상 외상센터의 규모나 의료진의 수, 일 년에 치료한 환자의 수 등에서 부산대병원은 서울대병원보다 객관적으로 우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으신 분’들의 말 한마디에 ‘잘하는 곳이 아닌 어딘가’가 되어버렸으니 의사들로서는 황당한 노릇이다. 지역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이 의료인들의 노력과 헌신을 순식간에 평가절하해 버린 셈이다.

또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특권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표가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기 위해 출동 대기 상태여야 할 119 구급 헬기가 동원됐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다른 응급 환자들을 제치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응급실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다. 연간 응급실에 오는 중증외상 환자는 약 12만여 명. 그중 3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부산에서 서울로 향한 이 대표의 선택은 권력을 앞세워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 새치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지역 차별적 시선을 전제로 한 특권의식은 왜 문제일까? 평범한 시민들의 직업윤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직업윤리는 모든 이들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근대적 윤리 가운데 하나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설명했던 바로 그것이다.

직업윤리 개념은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게 된다. 또한 모든 일은 아무리 힘들고 보잘것없는 일이어도 사회적 소명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인정받으며, 이는 사회적 평등 의식의 토대가 된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맡은바 자기 일에 충실한 시민들, 수많은 직업이 어우러져 살아가기에 타인의 직업과 삶을 존중하는 현대인의 윤리가 바로 직업윤리라 할 수 있다.

야당 대표가 흉기로 피습당하는 대형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이 대표의 편에 서는 일방적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대표가 119 응급헬기를 타고 서울대 병원으로 향하는 순간 사안의 논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을 ‘좋은 병원’이 아니라고 말한 셈이 되면서 그들의 직업윤리에서 나오는 자긍심에 상처를 입혔다. 이는 수출 공업 국가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부산·울산·경남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자존심과도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은 문제다.

야당에 우호적인 인사 중 일부는 이 사안을 부산대병원과 서울대병원의 싸움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듯도 하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생각이다. 고발장을 낸 소청과의사회뿐 아니라 부산시의사회, 전라북도의사회, 대전시의사회, 경상남도의사회, 심지어 서울시의사회마저 “헬기 특혜 이송이 지역의료계를 무시하고 의료전달체계를 짓밟아버린 민주당의 표리부동한 작태라고 지적한 부산시의사회에 십분 공감한다”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만 봐도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지난 5일 국민의힘 소속 홍준표 대구시장이 “제1야당 대표는 국가 의전 서열상 총리급에 해당하는 8번째 서열에 있다”며 헬기 이송을 옹호하는 듯한 페이스북 발언을 남겼던 것은 실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갈등은 여당과 야당의 싸움이 아니다. 근대적 직업윤리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과 전근대적 특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권이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특권의식에서 벗어나 직업윤리의 편에 서는 정치가 절실하다. 그러한 반성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만 해야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이번 사건은 정치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되짚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빠른 쾌유를 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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