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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9회 말 대타 vs 구원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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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예영준 중앙SUNDAY 편집국장

‘비대위’란 약어(略語)의 첫 단어인 비상은 말 그대로 정상이 아닌 상황을 뜻한다. 국민의힘 집권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세 번째 비대위가 출범했다. 비상 처방이어야 할 비대위 체제가 어느새 뉴노멀이 돼버렸다는 사실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하긴 비상 상황을 감지조차 하지 못하거나 애써 못 본 척하는 야당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일 수 있다.

많은 국민의 눈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무사 또는 1사 만루쯤 되는 일대 위기에 마운드에 오른 구원투수로 보인다. 그것도 선발투수가 일찍 얻어맞는 바람에 예정보다 빨리 올라선 조기 등판이다. 그런데 한동훈 위원장은 스스로를 9회 말 투아웃에 타석에 선 대(代)타자로 비유했다. 그게 그것 같지만 대타자의 역할과 구원투수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고, 투타겸전의 오타니가 아니라면 둘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동훈의 취임 일성은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의 포지셔닝과 타격 본능을 유감 없이 드러낸 공세적 연설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운동권 특권 정치의 청산’을 선포했다. 대신 오늘날 여당이 안고 있는 비상상황에 대한 진단과 성찰은 생략했다. 내 진영부터 먼저 돌아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전열을 가다듬은 연후에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는 싸움의 정석을 그는 따르지 않았다. 그가 타고난 인파이터이거나, 오랜 검사 경력을 통해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란 경험칙을 체화한 결과일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는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따져보면 운동권 정치의 청산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론 조사를 봐도 운동권 정치의 청산에 공감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다. 한때는 ‘젊은 피’였던 86세대 정치인들은 어느새 우리 사회를 낡은 프레임에 가둬놓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민주화 운동 경력을 무소불위의 마패 삼아 나 아닌 타자를 깡그리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아시타비(我是他非)의 독선적 행태일 것이다. 다수 국민이 86세대를 향해 “이제는 내려올 때”란 무언의 요구를 하고 있다. 그 요구의 강도가 가장 센 세대는 86 장기집권의 최대 피해자라 할 바로 아래 세대, 즉 97세대들이고 한동훈은 그 세대의 맏이 격이다. 한동훈의 운동권 정치 청산론은 4월 총선이란 결전을 앞두고 정부 여당으로 향하고 있는 ‘정권 심판론’을 ‘야당 심판론’으로 전환하는 효과도 내다봤음직하다.

운동권 청산론 시대 흐름 부합하나
윤석열 아바타 프레임에 갇힐 우려
정치 복원이야말로 국민들의 명령

하지만 여기엔 큰 함정이 있다. 운동권 정치 청산은 실은 윤 대통령이 대선 캠페인 기간 동안 어퍼컷 공세와 함께 즐겨 쓰던 구호였고, 취임 후에는 그 강도가 한층 더 세졌다. 설령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한동훈의 운동권 청산론이 윤 대통령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 국민은 알지 못한다. 한동훈이 운동권 청산론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는 ‘윤석열 아바타’란 프레임을 벗어던지기 힘들게 된다. 홍범도 흉상 이전을 비롯, 윤석열 정부가 주도한 몇몇 이슈가 이념 대결의 양상을 띠면서 오히려 지지층의 이탈을 불러왔던 사실을 냉철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국민들이 여야에 기대하는 것은 정치의 복원이다. 이 역시 윤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야당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운동권 청산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순간 그런 기대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4월 총선 결과가 정치적 복원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도하 언론사들의 신년 여론조사를 보면 여야 누구도 절대 우위가 없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로 인한 표심의 왜곡 현상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여야가 엇비슷 의석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상이다. 이준석 신당이든, 이낙연 신당이든 제3당이 선전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만약 그런 황금분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정치를 복원하라는 유권자의 준엄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