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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과 서초동 사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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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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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6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정치 참여를 선언했다.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입당조차 불투명한 시기였지만 국회의원 25명이 몰려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MB)과 가까운 이도 꽤 있었다. 알다시피 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MB 관련 '적폐' 수사를 지휘했다. 휘하의 핵심엔 한동훈 3차장도 있었다. "대장(MB)을 감옥에 보낸 이에게 부하들이 몰려가면 되겠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당시 그들의 해명이 필사적이었다. "망한 나라, 망한 보수 한번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왜 비웃느냐. 기자는 나라 생각 안 하느냐"며 노발대발했다. 결국 정권은 교체됐고, 그들의 자칭 '구국의 결단' 역시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4 신년인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4 신년인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2년 반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12월 26일, 무대는 윤봉길기념관에서 국민의힘 당사로 바뀌었다. 이번 주인공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이다. 윤 대통령의 정치 참여 선언 때처럼 인간 병풍들이 또 등장했다. 속사포 랩과 같은 취임사가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옳소"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메시아의 등장과 광적인 추종은 보수 세력엔 참 흔하고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이기고 있거나, 이길 것 같은 사람이면 누구든 OK였다. 허무 개그 수준의 황당 결말로 끝이 났지만 2017년 대선 후보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세우려 할 때가 특히 그랬다.

여당 구원투수로 등판한 한동훈
"또 검사냐" 국민 정서 잊지말고
직언하는 이들 등용해 경청해야

특히 이번 한 위원장 등판 과정에선 친윤계의 행보가 단연 가관이었다. 지난해 3월 전당대회에서 '나경원 규탄 연판장'을 돌렸던 초선들은 김기현 대표 결사 옹위에 올인했다가 다시 한동훈 모시기로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김기현 지도부의 일원으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에 백 번 책임이 있는 '나이만 젊은 피' 최고위원들은 반성 없는 유체이탈만 반복하다 ‘한동훈 띄우기'에 합류했다. 그들뿐이 아니다. 숱한 사람이 몰려든다. 더불어민주당 입당-탈당 후 시대전환 창당-시대전환 탈당 후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시민당 입당과 비례대표 당선-시대전환 복당-국민의힘과의 합당 등 초선이라고는 믿기 힘든 황당한 정당 편력의 정치인도 친한동훈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에서 "시대전환 대표가 아니라 태세전환, 자세전환 대표"라고 비판하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요즘 "내가 아는 그는 담백한 사람, (둘 다 술을 못해) 제로콜라 세 캔씩 여섯 캔 먹고 (술 없이 식사를) 끝냈다"며 한 위원장과의 남다른 친분을 드러낸다.

보수의 운명을 짊어졌다는 한 위원장의 숙제 중 하나는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옥석을 가리는 일이다. 듣기에 거북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사실 윤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이들을 과감히 등용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집권 이후의 시행착오를 상당 부분 줄였을 것이다. 사법리스크를 온몸에 뒤집어 쓴 야당 대표를 상대로 총선 패배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국정 지지율이 낮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윤 대통령 주변에선 "선거 준비만 빨리 했어도 강서구청장 선거는 이겼을 것" "총선에서 여당이 최소 135석으로 1당을 차지할 것"이란 말이 돈다는데, 이런 묻지마식 낙관론과 선을 긋는 것 역시 한 위원장의 숙제다.

얼마 전 김건희 여사 문제와 관련된 기자의 질문에 한 위원장이 "민주당에서 그런 거 물어보라고 시켰느냐"는 취지로 답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위원장과 기자 사이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정신이 멀쩡한 정치부 기자라면 민주당이 시키는 대로 질문하진 않는다. 타인이나 타 직종에 대한 지나친 단정이나 확신은 자기우월주의나 배려 부족, 사회성과 공감능력 결여로 비칠 수 있다. "또 검사냐"는 중도층의 거부감이 엄연한 현실에서 '여의도 사투리'만큼 '서초동 검찰 사투리'를 혐오하는 국민들의 존재 역시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