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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8000통 장난전화 건 60대, 벌금 단 20만원…美선 징역형 [가짜가 뒤흔드는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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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023년 12월 21일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에서 112 신고를 접수하고 있다. 직원 1인당 하루 평균 약 168건의 신고를 받는다. 오삼권 기자

2023년 12월 21일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에서 112 신고를 접수하고 있다. 직원 1인당 하루 평균 약 168건의 신고를 받는다. 오삼권 기자

가짜가 뒤흔드는 대한민국① 

“이상한 사람한테 스토킹 당했어요. 찾아온 적은 없고요. 사이버도 아니고. 참 이상한 건데요.”(20대 남성 A씨)

지난 21일 오전 10시쯤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에 스토킹 범죄 피해를 호소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신고자가 사는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로 순찰차 2대와 경찰관 8명을 급히 보냈지만 그 어떤 범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신고자의 정신 불안정에 따른 허위신고로 보고 발길을 돌렸다.

이날 오후 112상황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최영수 팀장(경정)은 “하루 평균 1만1100건인 112신고 중 절반가량이 이런 식의 허위신고나 장난전화, 휴대전화 오작동 신고, 범죄와 무관한 민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상(異常) 신고들 때문에 긴급한 범죄 현장으로 출동이 지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12 신고는 생명 등 신체 위해를 받을 수 있는 급박한 범죄와 재난·재해 위험 상황에서 국민안전을 지키는 국가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가짜’ 신고에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작 긴급 구조를 받아야 할 국민 생명과 안전을 대가로 지불하면서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 전경. 이 상황실에서만 지난해 964건의 허위신고를 접수했다. 이아미 기자

지난 21일 오후 서울경찰청 112치안종합상황실 전경. 이 상황실에서만 지난해 964건의 허위신고를 접수했다. 이아미 기자

전국 허위신고 2020년 4000여 건→올해 4400여 건 돌파

실제 이상 신고에 따른 경찰력 낭비는 심각하다. 그중 가장 악성이 있지도 않은 범죄를 신고해 경찰력을 동원하게 하는 허위신고다. 허위신고는 한동안 주춤했다가 ‘묻지마 흉악범죄’의 영향을 받아 최근 들어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허위신고 접수 건수는 2020년 4063건→2021년 4153건→2022년 4235건→올해 10월까지만 4436건으로 급증했다.

허위신고 중에서도 지난 7월 서울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이후 유사한 흉기 테러를 예고하는 ‘위험한 신고’가 많아진 것도 문제다. 30대 남성 B씨는 지난 8월 8일 112에 전화해 “청량리역인데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겠다”고 했다가 지난달 10일 1심에서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징역 1년을 받았다. B씨는 허위신고 이유로 “외로워서 관심받고 싶었다”며 “경찰관이 얼마나 빨리 출동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9월 초 서울의 한 승용차에 타고 있던 여성이 유리문을 연 채 장난으로 “납치당했다”고 소리를 질렀다가 이를 본 다른 차량 운전자가 112 신고해 5개 경찰서 형사 등 60여 명이 출동하는 일도 벌어졌다. 미국에선 이처럼 총기·폭탄테러나 인질극 등 경찰특공대(SWAT) 출동을 야기하는 거짓 신고를 별도로 ‘스와팅(swatting)’이라고 부르고 중범죄로 처벌한다. 일종의 “테러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하루 489통 장난전화에 벌금 20만원…경찰 “돈 내고 계속한다”

범죄와 무관한 장난전화도 경찰을 곤란하게 한다. 대전경찰청 112상황실 직원들에겐 60대 여성 C씨가 ‘프로 장난전화러’로 유명하다. C씨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112에 1만 8000통(하루 최대 489번)의 장난전화를 걸었다. “경찰이 똑바로 일을 안 한다” 등의 말을 하거나 아무 말 않고 끊는 식이다. 이후 C씨는 지난 9월 6일 1심에서 경범죄처벌법상 업무방해 혐의로 벌금 20만원을 선고받고도 계속 장난전화를 건다고 한다. 대전경찰청 112상황실의 이상길 팀장(경정)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하루에 한두 통씩 걸기도 해 더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라고 했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에서 얼떨결에 112신고가 들어온 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례(오작동 신고)도 잇따른다. 삼성전자 갤럭시S의 경우 전원 버튼을 빠르게 5번 누르고 디스플레이에 뜬 ‘SOS’ 버튼을 누른 채 옆으로 밀면 112에 전화가 간다. 경기남부경찰청 112상황실의 박기성 관리팀장(경정)은 “이런 오작동 신고라도 신고자가 범죄자에게 협박당하는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출동해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112신고로 민원전화를 거는 경우도 많다. 실제 접수 사례엔 “대학생인 딸이 11시 시험인데 도서관에서 잠든 것 같으니 깨우게 위치를 추적해달라” ”입사 면접 보러 가는데 순찰차에 태워달라” “바퀴벌레를 잡아달라”는 등의 내용이 눈에 띈다.

26일 오후 한 삼성전자 갤럭시 S22 울트라 기기의 디스플레이 캡처 화면. 전원 버튼을 빠르게 5번 누르면 이 같은 화면이 나타난다. 김민중 기자

26일 오후 한 삼성전자 갤럭시 S22 울트라 기기의 디스플레이 캡처 화면. 전원 버튼을 빠르게 5번 누르면 이 같은 화면이 나타난다. 김민중 기자

“허위신고 큰 범죄라는 인식 부족…솜방망이 처벌 강화해야”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교수는 “특히 허위신고는 매우 큰 범죄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 하는 국민이 많아 각성이 필요하다”며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해방구로 허위신고 등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사법처리 비율을 더욱 높이고 처벌 규정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이 지난해 접수한 범죄 허위신고 중 처벌 비율은 약 93%로 높아졌다. 다만 이 중 75%가량이 경범죄로 즉결심판에 넘겼다. 경범죄처벌법상 허위신고 혐의가 적용되면 60만원 이하의 벌금 등에 처할 수 있다. 같은 법상 업무방해 혐의면 벌금 한도가 20만원으로 낮아진다. 내년 6월 시행되는 112기본법에 따르면 허위신고 등에 대해 500만원까지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이란 지적도 나온다.

미국은 단순한 911 허위신고(경범죄)인 경우 징역 1년까지, 경찰 긴급 대응에서 사상자를 나올 수 있는 허위신고를 한 경우 최대 징역 3년에 처하도록 한다. 영국은 6개월 이하 징역형 등, 호주는 3년 이하 징역형 등이다.

전문가들은 허위 신고자에 손해배상청구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재까진 경찰이 신고자에 민사소송을 건 사례는 한 건도 없다.

황문규 중부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회적으로 1인 가구 증가와 정신질환자 및 마약사범 확대 등의 영향도 크기 때문에 관련 대응도 함께 해야 한다”며 “상습 특이 민원자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연간 정신질환자 수는 2015년 약 289만 명에서 매년 늘어 2021년 411만 명을 기록했다. 마약사범은 올해 11월까지만 역대 최대치인 1만 7152명(경찰 검거 기준)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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