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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양승태·김명수의 실패를 극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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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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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소한 측은 끊임없이 상소를 거듭하며 3단계의 절차를 다 거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오늘의 재판 현실입니다.”
12년 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때 훗날 이 생각이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상고심 급증은 심각했다. 대법관 한 명이 6년 임기 동안 합의한 건수가 4만 건을 넘기는(김영란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실정이었다. 재판 지연과 부실화는 이미 사법부의 최우선 해결 과제였다.
“나라를 위하는 최선의 사법제도를 창안하는 데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라던 양 전 대법원장은 비교적 단순한 상고 사건을 담당하는 ‘상고법원’을 구상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국회와 언론은 물론 박근혜 정부 청와대까지 전방위 설득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졌고 법원을 초토화한 ‘사법 농단’ 사건으로 이어졌다.

상고법원 밀어붙이다 불행 자초

상고법원 발상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 역시 취임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상고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구체적 방안으로 상고허가제·대법관 증원과 함께 상고법원을 제시했다.

법원 외부 설득에 전력을 다한 양 전 대법원장과 달리 김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 내부의 변화에 치중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하고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실시했다. 이런 조치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서열에 따라 설 자리가 정해지고, 열림 버튼의 경쟁적 작동으로 공경심을 표한다는(문유석 『판사유감』) 법원의 과도한 서열주의를 깨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재판 지연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판사들의 만족도는 올라갔을지 몰라도 국민의 고통은 극심해졌다.

판사 경쟁 없애 재판 지연 악화

취임 당시 약속과 달리 김 전 대법원장은 상고심 문제 해결에 별다른 성과를 못 냈다. 대법관 4명 증원을 포함한 상고제도 개선안을 내놨지만, 반향이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상고심 상황은 나아졌다. 이형근 특허법원 고법판사(재판장)가 법관통합재판지원시스템과 사법연감을 분석한 결과 상고심 민사 본안 미제사건이 2017년 7190건에서 2022년 4523건으로 줄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손뼉 칠 일이 아니다. 1심 재판이 지연되면서 상급심 건수가 줄어든 현상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한 고법의 부장판사는 “지난해 1심에서 10건이 올라왔다면 올해는 8건 정도로 줄었다”면서 “항소심이 줄어드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고 말한다.
재판 지연은 날로 심해진다. 합의사건 처리 기간의 경우 2017년 294일에서 2021년 369일로 대폭 증가했다. 주심판사 한 명이 주당 3건만 처리하기로 정하고선 쉬운 사건만 손을 대 장기 미제가 늘어난다.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와 법원장후보 추천제 등이 지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승진 경쟁이 사라지니 좋은 평가를 받으려 처리 건수를 늘릴 필요를 못 느낀다. 고위 법관은 신속한 재판을 독려하기는커녕 후배 판사들의 눈치를 본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조희대 대법원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11일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은 전임자가 남긴 난제를 떠안았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는데도 법원이 이를 지키지 못하여 국민의 고통을 가중하고 있다”는 취임사에서 그의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조 대법원장만큼 사법부 개혁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도 어렵다. 그는 양승태 코트(법원)와 김명수 코트에서 대법관을 지냈다. 두 전임자의 혁신 시도가 최악의 상황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부담도 별로 없다. 현 정권이 원한 대법원장은 그가 아니었다. 이균용 전 대법원장 후보자를 사법부 수장으로 낙점했지만, 국회 문턱에 걸리자 대안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오히려 야당 지지까지 끌어내 대법원장 공백 사태를 해결했으니 정권이 조 대법원장에게 빚을 진 셈이다.
문제는 재판 지연이 점점 악화하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현실이다. 경력 법관이 늘면서 판사 평균 연령이 2013년 39.8살에서 2022년 44.2살로 높아진 고령화 추세(이영창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를 되돌리기 어렵다.

AI 활용, 판결문 혁신 제안 솔깃

판사는 일반인과 달라서 경쟁이 없어도 최선을 다한다는 가정이 허구로 드러난 만큼 선의의 경쟁이 살아나게 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판사를 선출하지 않는 나라에서 법원장은 여론재판으로 선발하는 모순 역시 고쳐야 한다. 상고법원을 능가하는 파격 발상 없이는 근본 해결이 난망하다. 재판에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주장이나, 판결서 작성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자는 이형근 고법판사의 제안 등 신선하면서도 효과가 기대되는 발상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두 사람 모두 재판 경험이 풍부한 법관이라 더 솔깃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