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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 대법원이 먼저 제동 걸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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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기준 계산한 원심 파기…기업 선택 넓혀

말만 요란한 정부, 근로자 건강 위해서도 보완책 내야

주 52시간제 근무 방식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루 8시간 근로’를 기본으로 설정하고 이를 초과한 근로시간을 더해 52시간 준수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한 1, 2심 판결보다 기업에 근무 형태의 선택 폭을 넓혀준 첫 판례다.

항공기 객실청소 업체 대표 A씨가 근로자 B씨에게 ‘3일 연속 근무 후 하루 휴무’를 주는 ‘집중 근무’ 체제로 일하게 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재판에서였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하급심이 유죄로 판단한 이 소송의 사례 중 일부에 대해 “근로기준법 규정을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지난 7일 파기 환송했다. ‘하루 8시간 근로’ 기준이 아니라 주간 전체 근로시간을 더해 52시간이 넘지 않으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로써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보다 유연한 적용이 가능해졌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서 2~3일 집중적으로 코딩하고 나머지 4~5일을 쉬는 형태가 폭넓게 허용된다. 산업 경쟁력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방향이다. 주 52시간제는 도입 당시부터 경직되고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반 관리 업무 등 일정한 패턴으로 이뤄지는 근무에는 적합하지만, AI 관련 기업처럼 단기 집중력이 관건인 분야에선 경쟁력 저하가 우려됐다. 특히 미래 유망 산업일수록 엄격한 주 52시간제 적용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잇따랐다. 이번 대법원 판단으로 첨단 산업이나 스타트업 분야는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게 됐다. 생산성을 높일 근무 방식 설계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대법의 판단은 현행 법률의 틀 안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그동안 산업계에서 제기해 온 ‘주 단위’ 초과근무 제한 등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난제를 풀어야 하는 주체는 정부와 국회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노동개혁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변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혼선만 반복했을 뿐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월·분기 등 단위로 연장근로를 운영하려던 구상은 ‘(최대) 주 69시간 근무제’라는 비판에 맞닥뜨리자 흐지부지됐다. 전면 개편에서 후퇴해 일부 업종과 직종에 한해 연장근로를 개편하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이 역시 진전이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아니었다면 기업들은 말만 무성한 각종 개혁 구상을 들으며 기약 없는 ‘희망 고문’에 시달렸을 게 분명하다.

대법원 판례가 나온 만큼 정부는 서둘러 회사와 근로자가 모두 수긍할 근로시간 혁신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당장 이번 판결로 인해 근로자가 과도한 연속 근무에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나온다. 근로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정부는 신속하게 주 52시간제 개선 방안을 제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