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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제 돈이라면 이렇게 못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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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협상 잘됐습니다. 과정을 다 말하면 (송언석 예결위 여당 간사와) 둘이서 책 한 권 쓸 수 있을 것 같고요.”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합의 처리를 발표하던 20일, 강훈식 의원(더불어민주당 예결위 간사)이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책 한 권’ 분량의 샅바 싸움을 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예산 국회를 지켜보면서 올해는 정말 쉽지 않다고 느꼈다. 나중에 삭감될망정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상임위에서 증액된 예산이 17조원이었다. 국회 선진화법 시행 이후 가장 늦게 예산이 통과된 지난해 기록(12월 24일)이 깨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늦게라도 예산안이 통과돼 다행이다.

1년 전 예산 칼럼 지금 써도 유효
소소위 기록 나중에라도 공개를
재정 적자 지속, 아껴서 잘 써야

1년 전 국회의 예산안 처리를 비판하는 칼럼 ‘반띵 예산 깜깜이 예산’을 썼다. 지역사랑상품권 등 쟁점 예산 중에 민주당 요구액이나 정부안의 절반으로 숫자가 결정된 사례가 많아 ‘반띵 예산’이라고 명명했다. 예산 심의가 부실하니 똑 부러진 근거나 설명도 없이 ‘반띵’을 한 거였다. ‘깜깜이 예산’은 법적 근거도 없고 속기록도 작성하지 않는 소(小)소위에서의 정실(情實)·부실 심의를 말한다. 1년 전 칼럼에서 예산 숫자 몇 개만 고치면 지금 그대로 써도 될 정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간 연구기관인 나라살림연구소가 지난 24일 발표한 이번 예산국회 보고서를 올해도 주목해서 읽었다. 국회 증액 예산을 뜯어보니 지역 종교시설 예산, 대규모 사업의 예비 단계인 타당성 용역 예산, ‘나눠먹기식’의 도로 등 지역 개발 예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부산 지역 예산이 많이 증액됐다고 했다. 국회가 감액한 4조7000억원 가운데 공식 채널인 국회 예결특위에서 감액된 금액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증액은 단 1원도 예결특위에서 논의되지 않고 모두 소소위(2+2 협의체 포함)에서 진행됐다.

물론 예산 처리 과정에서 2008년 등장한 소소위가 관행처럼 자리 잡은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야 협상 과정에서 합의를 위한 어느 정도의 주고받기는 불가피한 비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예결특위에서 내년도 9000개의 예산 세부사업 가운데 661건만 심의했고, 이 가운데 대략 350건만 원안 유지나 수정으로 합의했다. 합의한 사업금액이 5000억원에 불과했다. 국회의 감액과 증액 논의에서 예결특위는 뒷전이고 소소위가 거의 모든 것을 주물렀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 셈이다. 심각한 본말 전도다.

속기록조차 없는 소소위의 밀실 합의는 심각한 문제다. 강훈식 의원이 말한 ‘책 한 권’ 분량을 다 공개하지 않더라도 누가 어떤 근거로 예산을 가져갔다는 최소한의 기록은 남겨야 한다. 국회와 정부는 국민에게 그 내용을 설명할 책임이 있다. 소소위 속기록을 공공 기록물로 지정해 몇 년 뒤에라도 공개하자는 주장을 나라살림연구소가 예전부터 해왔다.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예산 타협 과정을 당장 공개하면 여야 지도부와 예산 당국에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이를테면 이번 도로 등 지역 개발 사업 예산의 경우 지역도 다르고 사업 내용도 다른데 10억원, 20억원, 30억원 등 같은 규모의 증액이 많다. 보고서는 “일정금액을 ‘나눠먹기’식으로 분배한 방증”이라고 했다. 여야가 주도하고 기재부가 미필적 고의로 방조한 ‘예산 카르텔’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카르텔이 여기에도 있었다. 그래도 이런 내용이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3년 혹은 5년 뒤에라도 공개된다면 지금과 같은 노골적인 주고받기는 어느 정도 제어되지 않을까.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맸다지만 내년 역시 통합재정수지 적자가 44조원이 넘는다. 우선순위를 잘 따져 아껴 쓰고 제대로 써야 한다. 오로지 홍보용 현수막을 노리는 의미 없는 예산이 너무 많다. 제 돈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쓰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