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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한동훈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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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지명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2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을 마치고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지명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2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을 마치고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저 낮은 곳을 향해 온 아기 예수의 사랑이 새삼 새롭다. 이제 아이들 대다수가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을 만큼 조숙해졌으나 지난밤 많은 가정에서 촛불을 켜고 케이크를 자르지 않았을까. 그래도 성탄은 성탄이니까.

1960년대 초반 일본 교토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였다. ‘이코노믹 애니멀’(경제동물)이 유행했다. 그래도 성탄은 성탄이었다. 만취한 아버지들은 늦은 귀가에 속죄라도 하듯 성탄 전날 선물과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소년의 집은 달랐다. 집이 가난했기에 성탄절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소년의 어머니는 케이크를 잊지 않았다. 다만 성탄절 이브가 아닌 당일 아침에 샀다. 제과점에서 전날 팔고 남은 케이크를 한 푼이라도 싸게 살 수 있어서다.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된다” 언급
재일 작가 서경식이 평생 새긴 말
한동훈이 편들고 싶다는 ‘약자’는?

“어머니가 씻지도 않은 칼로 잘라주셨기 때문에 우리 집 크리스마스 케이크엔 언제나 마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소년은 이렇게도 말했다. “내게는 자랑할 선물은 없었지만 그 대신 어른들의 위선에 휘둘리지 않는 조숙한 리얼리스트가 될 찬스를 맞았다.”

여기서 ‘꼬마 리얼리스트’는 지난 18일 타계한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명예교수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쓴 미술사학자이자 우리 사회에 ‘디아스포라’(이산) 논의를 불 지핀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재일 조선인 2세로서의 차별과 고통이 그가 더 넓고 깊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서경식의 부음이 국내에 전해진 지난 19일, 지금은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취임을 앞둔 한동훈 전 법무장관의 발언 하나가 귀에 쏙 박혔다.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엔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치 경험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응수였는데, 그가 사실상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순간이었다.

해당 발언은 중국 대문호 루쉰(魯迅)의 단편 ‘고향’의 마지막 대목이다. ‘소년 서경식’이 일생 품고 살았던 말이기도 하다. 서경식이 어린 시절 편력한 책 이야기인 『소년의 눈물』에 루쉰의 ‘고향’이 소개된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 마지막 부분의 몇 행은, 마치 식물이 모근에서 빨아들인 자양분처럼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숨 쉬고 있었다.” 시쳇말로 뼈에 사무친 모양이다. 근대 서구문명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익사 상태에 빠진 중국의 현실을 통찰한 루쉰처럼 서경식은 나라를 앗기고 타국에서 살아가는 국외자의 아픔과 또 이를 딛고 일어설 희망을 ‘고향’에서 찾은 것 같다.

소설에서 해당 발언의 앞부분은 이렇다. “희망이란 본래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희망은 대지 위에 난 길과 같다.” 있는 듯한, 없는 듯한, 그래도 그것 하나밖에 잡을 게 없는 낭떠러지 앞의 인간을 보는 듯하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리라.

‘루쉰의 길’ ‘서경식의 길’은 ‘한동훈의 길’과 결이 다르다. 아니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저런 굴곡은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 꽃길’을 걸어온 한동훈이 ‘고향’에서 어떤 길을 읽었을지 궁금하다. 그냥 대중 앞에 내놓은 멋진 문구가 아니기를 바란다. 여의도 사투리가 아닌 오천만의 언어를 쓰겠다면서도 상당 부분 독설과 공격의 ‘여의도 말본새’로 커 온 그이기에 그렇다.

한동훈의 현실 인식은 적확하다. 그의 말처럼 여당 국민의힘은 현재 ‘9회말 투아웃’에 서 있다. 하지만 함부로 배트를 휘두를 일은 아니다. 그도 ‘9회말 투아웃’에 일조한 선수이지 않은가. 또 실제로 야구에서 9회말 역전승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한동훈은 법무부 장관 이임사에서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고 했다. 대다수 정치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약자와의 동행’을 수없이 반복했다. 비대위원장 한동훈의 약자는 누구일까. 그 실체에 따라 내년 4월 총선도 판가름 날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