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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받아달라” 외치다 뛰어내린 아빠, 부모 대피시키고 쓰러진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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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소방대원들이 화재진압을 하고 있다. [뉴시스]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소방대원들이 화재진압을 하고 있다. [뉴시스]

“새까맣게 타가지고. 아이고 어떡해. 마지막에 나오다가 못 빠져나온 거야.”

서울 노원구의 한 장례식장.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고층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장례식장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날 새벽 아파트 3층에서 시작된 불은 외벽을 타고 위층으로 번졌다. 같은 라인 10층에서 70대 부모님, 동생과 함께 잠을 자던 임모(38)씨는 119 화재 신고를 한 뒤 가족을 깨워 대피시켰다. 마지막으로 탈출한 임씨는 결국 11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도봉소방서는 임씨 사인을 연기 흡입에 따른 질식으로 추정했다. 병원에서 치료 중인 임씨 동생은 “집에서 나오지 말고 있었어야 했어, 형”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연신 울먹였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소방 당국에 따르면, 23층짜리 이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한 건 이날 오전 4시57분쯤이다. 이 사고로 임씨와 4층 거주자 박모(32)씨 등 2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박씨는 아래층(3층)에서 불길이 치솟자 “(아이를) 받아 달라”고 외치다가 이불로 감싼 생후 7개월 아이를 안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아내는 2살인 아이를 재활용품 포대 쪽으로 던진 뒤 역시 뛰어내렸다. 박씨는 떨어진 뒤 머리 쪽을 다쳐 안타깝게 숨졌고, 아내는 어깨 골절상을 입어 입원 치료 중이다. 두 아이는 무사히 구조돼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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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이들도 있다. 20층에 사는 박모(71)씨와 남편 유모(79)씨는 함께 집 앞 복도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박씨가 심폐소생술 끝에 회생하는 등 두 사람 모두 의식을 되찾았다. 화재가 처음 발생한 3층 거주 70대 노부부도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2001년 완공, 소방시설 의무화되기 전

처음 불이 난 3층 집 내부가 전소한 모습. [사진 소방재난본부, 도봉소방서]

처음 불이 난 3층 집 내부가 전소한 모습. [사진 소방재난본부, 도봉소방서]

화재는 발생 3시간여 만인 오전 8시40분쯤 진화됐다. 불은 3층에서 시작됐지만, 아파트 내부 계단 통로가 굴뚝 역할을 하면서 연기가 삽시간에 위층으로 퍼졌다. 그을음이 15층에서 발견됐을 정도다. 소방에 따르면, 이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와 방화문이 설치되지 않았다. 아파트가 완공된 2001년 당시에는 설치 의무 규정이 없었다. 임시대피소로 피신한 한 주민은 “화재 당시 연기로 인해 어디가 계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실내가 컴컴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전문가들은 저층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무조건 뛰어내리기보다는 화장실 욕조 등으로 대피하라고 권고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저층에서 불이 나고 계단을 통해 연기가 올라오는 경우, 물을 묻힌 옷가지 등으로 일단 문틈을 막아 연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베란다를 통해 불길이 올라오면 창문을 막고, 화장실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대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휴대용 방독면을 비치해 두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소방 관계자도 “화재가 발생하면 뜨거워서 뛰어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고층에서 뛰어내릴 경우 머리부터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화장실에 물을 틀어놓은 뒤 그쪽으로 대피하고, 소방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방 당국과 경찰은 26일 합동 현장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이날 17가구가 화재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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