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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운명공동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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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호 31면

민감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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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베트남 국빈 만찬장. 일렬로 마련된 헤드테이블에 앉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와인잔을 들고 일어서 베트남 권력서열 1위 응우옌푸쫑 공산당 총서기에게 걸어가 건배를 제의했다. 응우옌 총서기는 앉은 채 잔을 부딪친 뒤 바로 고개를 돌렸다. 중국인에게 의전 사고로 여겨질 만한 장면이 베트남 관영 V뉴스에 방영됐다. 건배 영상은 중국 SNS에서 차단됐다. 베트남의 중국식 표기인 웨난(越南)과 건배를 뜻하는 징주(敬酒)가 민감어가 됐다.

시 주석의 이달 베트남 국빈 방문은 건배 사건 외에도 이른바 ‘운명공동체’ 번역이 구설에 올랐다. 중국 관영매체는 “전략적 의의를 갖춘 중국·베트남 운명공동체”로 미국·베트남 관계보다 한 등급 올렸다고 선전했다. 반면 베트남은 “베·중 미래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덤덤하게 표현했다. 외신은 “하나의 공동체, 두 개의 표현”이라 꼬집었다. 중국에서 하나의 공공 기관이 공산당과 국무원(정부) 업무를 함께 수행하는 ‘한 기구 두 문패(一個機構 兩塊牌子)’ 현상에 비유했다. 대신 중국과 베트남은 영문 공식 표현을 ‘운명공동체(Common Destiny)’가 아닌 ‘미래를 공유한다’(Shared Future)고 똑같이 맞췄다. 여기에는 서양 독자가 경계심을 풀도록 중국식 정치 용어를 순화 번역한 노하우가 담겨있다.

운명공동체라는 낯선 용어는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13억 대륙 동포와 2300만 대만 동포는 핏줄이 이어진 운명공동체”라면서다. 한국에서는 ‘운명’이 더 널리 쓰이지만 중국에서는 ‘명운’이라 쓰는 게 일반적이다. 당시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same blood and share a common destiny”로 번역했다. 하늘이 정한 숙명이라는 데스티니의 부정적 뉘앙스가 거슬린 중국은 2015년 9월 시 주석의 유엔총회 연설을 앞두고 공식 번역을 바꿨다. 중국 안에서는 계속 인류운명공동체로 선전하면서도 영어권 청취자를 위해 ‘미래를 공유한 공동체’로 프레임을 바꿨다.

중국은 종종 사자성어를 번역하며 낭패를 봤다. 덩샤오핑식 외교를 말하던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복수극 오해를 불렀다. 실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는 ‘hide one’s capabilities and bide one’s time’이라는 의역 때문이다. 춘추시대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복수극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구분이 어려웠다. 미국은 중국의 전략적 속임수라며 내심 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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