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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54계단 기듯이 내려갔다" 최강한파 곳곳 아찔한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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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기온이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진 2023년 12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시민들이 입김을 내며 서 있다. 연합뉴스

체감기온이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진 2023년 12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시민들이 입김을 내며 서 있다. 연합뉴스

21일 오전 6시 30분쯤 서울 동대문구의 지하철 1호선 회기역. 승객 25명가량이 승강장 대신 대합실에 모여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이하인 한파로 승강장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기 때문이다. 넥워머 등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회사원 김정환(51)씨는 “승강장으로 내려가기가 너무 추워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역 방향 열차가 들어오자 승객들은 우르르 내려갔다. 그러나 열차 안에도 한파는 비집고 들어왔다. 다음 청량리역에 도착해 출입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들이닥쳤고, 출입문 근처 좌석에 앉아 있던 회사원 이철현(37)씨는 급히 중간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씨는 “원래 출입문 근처 자리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차서 안 되겠다”고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21일 오전 7시 현재 서울의 기온은 영하 15도 가까이 떨어져 올겨울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체감기온은 영하 20도를 밑돌았다. 북극에서 내려온 한기가 한반도를 영항권 아래 둬서다. 이 때문에 기상청은 올해 처음으로 한파경보를 발령했다. 한파경보는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5도 이하로 이틀 이상 지속되거나 급격한 저온 현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중대한 피해가 예상될 때 내려진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언덕 위 다세대·다가구 밀집지역. 강추위에 긴 계단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직장인들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곤욕이었다. 오전 7시 30분쯤 집을 나선 김인순(57)씨가 눈 덮인 계단 54개를 천천히 한 걸음씩 내려갔다. 가죽 장갑을 낀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서다. 김씨는 “어젯밤에 염화칼슘을 뿌렸는데도 이렇다”며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이날부터 22일까지 수도권의 예상 적설량은 1~3㎝다.

 21일 오전 7시 32분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다세대·다가구 주택 밀집지역. 집을 나선 주민들은 좁고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이용해 일터로 향해야 했다. 계단 위엔 눈이 쌓여 미끄러웠다. 오삼권 기자

21일 오전 7시 32분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다세대·다가구 주택 밀집지역. 집을 나선 주민들은 좁고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이용해 일터로 향해야 했다. 계단 위엔 눈이 쌓여 미끄러웠다. 오삼권 기자

열대지방인 베트남에서 살다 한국에서 일터를 잡았다는 베트남인 통역사 김은화(한국이름·32)씨는 이날 한파가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경기 광주시 집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오전 7시 40분쯤 내린 김씨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추운 날씨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실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한파와 싸워야 한다. 오전 7시 40분쯤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한 재개발 구역에선 건설자재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고 있었고, 게이트 앞에선 빨간 안전모와 조끼를 입은 신호수가 안전봉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벙어리장갑까지 꼈지만 역부족. 입을 포함한 얼굴이 얼어서 말을 할 때 어눌하게 들렸다. 보다 못한 인근의 주민 송영표(85)씨는 김이 나는 커피포트와 커피믹스, 종이컵을 들고 와 “물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마시세요”라며 권했다.

노숙인들에게 한파는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 오전 6시 30분쯤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영등포역 인근 백화점 앞에 노숙인 텐트 3개가 서 있었다. 이 중 한 텐트에서 나온 노숙인 이형남(63)씨는 몸을 떨면서 “어제 오후 10시 잠들었는데 새벽에 백화점 직원 같은 사람이 와서 깨우면서 다른 데로 가라고 했다. 뒷골목 안 보이는 데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지원하는 영등포보현종합지원센터 관계자는 “어젯밤에 노숙인 190명 정도가 한파를 피해 이곳을 왔다 갔다”고 전했다. 기상청은 한파가 22일까지 지속하고 그다음 날부터 풀릴 것으로 내다본다.

21일 오전 7시 30분쯤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영등포역 인근. 한 노숙인이 지난 밤 사이 텐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는 “너무 추워 수시로 자다 깨다 뒤척였다”고 말했다. 김대권 기자

21일 오전 7시 30분쯤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영등포역 인근. 한 노숙인이 지난 밤 사이 텐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는 “너무 추워 수시로 자다 깨다 뒤척였다”고 말했다. 김대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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