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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정치 권력과 대형 플랫폼에 경고한 EU의 언론자유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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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의 기자 압박, 플랫폼 횡포 방지 조항 포함

‘언론자유지수’ 하락한 한국이 타산지석 삼아야

유럽연합(EU)에 ‘언론자유법’(EU Media Freedom Act)이 생긴다. EU 이사회와 집행위원회, 유럽의회 대표단이 그제 법안 내용에 합의했다. 형식적 통과 절차만 거치면 27개 EU 회원국에 강제력을 갖춘 법이 된다. 발효 시점은 내년 상반기다. EU의 법은 각 회원국 법률에 대해 상위법적 지위를 갖는다. 충돌 조항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선언적 의미를 넘어선 실제 효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 법안에는 기자를 비롯한 미디어 종사자에 대한 감시(도청·미행 포함)와 스파이웨어를 이용한 정보 탈취 금지가 들어 있다. 언론인의 취재 경로와 비공개 취재원 접촉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정부의 강제적 수단 사용 금지 조항도 있다. 테러나 중대 범죄 수사 등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만 예외인데, 이때도 반드시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삼은 언론사·언론인 통제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법안에는 미디어 종사자의 안전 보장을 위해 각 회원국이 효과적 장치를 마련하라는 권고도 포함돼 있다.

법안에는 대형 온라인 플랫폼의 개별 언론사 편집권 침해 금지 조항이 있다. 편집 기준을 바꾸도록 하면 위법이 된다. 또 대형 플랫폼이 이미 게재된 언론사의 콘텐트를 삭제할 경우 24시간 안에 통보하며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회원국 정부가 언론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키워야 하며, 공공 미디어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지난해 서유럽 국가 주도로 발의됐다. 동유럽 회원국에서 국가 안보를 이유로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압력 행사가 빈번히 발생하고, 그 압박이 플랫폼을 통해 관철되기도 한다는 판단에서 추진됐다. 대형 플랫폼이 사업적 이유로 미디어의 독립성을 해치는 현실도 반영됐다. 법안에는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양대 세력은 자유민주사회 틀에서 벗어난 권력, 자본 이익에만 충실한 플랫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국 상황은 과연 어떤가. 지난 정부 시절 20여 개 언론사 소속 기자 120여 명이 공수처에서 통신자료 조회를 당했다는 게 드러났다. 종편 소속 기자가 검사와 짜고 범죄자에게 정권에 불리한 진술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구속까지 됐으나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번 정부에서도 검경의 기자와 언론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어진다. 범죄 수사에 필요한 부분도 있겠으나, 언론 자유라는 중대한 가치를 고려한 신중한 태도가 아쉽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 43위에서 올해 47위로 내려앉았다. 대형 플랫폼(한국에선 포털)이 언론 지형을 지배하는 것은 유럽보다 한국이 심하다. EU의 ‘언론자유법’ 제정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