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00년 전 멸망한 거란족, 우리 중에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차이나랩

차이나랩’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속 한 장면. KBS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속 한 장면. KBS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화제다. 스펙터클한 전쟁 신과 배우들의 열연, 탄탄한 스토리로 인기몰이 중이다. 특히 시청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흥미 요소다.

거란은 어떤 민족이고 어떤 역사를 가졌나. 거란의 한자명은 계단(契丹)이다. 붉을 단(丹)자가 활음조 현상으로 ‘란’으로 발음된 경우다. 중국에선 치단, 일본에선 키단, 유럽에선 키타이라고 불렀다. 한때는 유럽에서 중국을 ‘차이나’ 대신 칭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거란족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다.

거란국은 916년 ‘거란’이란 명칭으로 건국됐다. 이후 947년 대요(大遼)로 개명했고 983년 다시 대거란, 1066년엔 또다시 대요로 바꿔 1125년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거란인들은 시종 자신들을 거란이라 불렀고 요라는 국호는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과 고려에 의해 편의적으로 쓰였다.

드라마를 보면 거란인들은 정수리만 삭발한 독특한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를 곤발(髡髮)이라 불렀다. 여성들도 이런 머리였다고 한다. 거란족은 원래 서랴오허(西遼河)강 상류인 시라무룬강과 라오허강 사이 지역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선비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역사에선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에 ‘계단(契丹)이 북쪽 변경을 침범해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곤발을 한 청년의 모습. 위키피디아

곤발을 한 청년의 모습. 위키피디아

거란이 건국하던 즈음인 907년 당나라가 무너진다. 중원의 지방 장악력이 약화된 틈을 타 거란 부족장 중 한 명이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부족들을 통일하고 황제에 오른다. 원래는 부족장들이 돌아가며 임기제 수장을 맡았으나 야율아보기가 916년 종신 황제에 등극했다. 이후 황제는 그의 자손인 야율씨가, 황후는 소(蕭)씨가 도맡았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군 총사령관이었던 소손녕과 소배압이 이 소씨다.

부족을 통일한 거란은 바로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몽골 초원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918년엔 동쪽의 발해와 전쟁을 벌여 멸망시킨다. 이후 발해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아들에게 통치시킨다. 동쪽의 거란이란 뜻으로 일종의 분국을 세운 것이다.

발해의 멸망으로 거란은 일약 동아시아 강국으로 떠오른다. 발해는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거란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문명국이었다. 또 발해의 인구를 거의 고스란히 흡수해 대규모의 노동력과 군사력을 확보함으로써 대제국의 발판을 마련했다.

거란이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의 5대 10국 시대 후당의 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거란에 도움을 요청한다. 거란 태종은 기병 5만을 일으켜 후당을 멸망시켰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연운 16주를 거란에 내어주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다. 또 10살 넘게 어린 거란 태종을 아버지로 모셨다. 연운 16주는 지금 베이징 일대의 땅으로 장성 이남 지역이다. 흉노, 돌궐, 위구르가 넘지 못했던 장성을 거의 공짜로 넘어 중원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대륙을 통일한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한동안 치열하게 싸운다. 송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거란도 고려와 여러 번 화친을 청했지만 고려는 형제국 발해국을 멸망시킨 거란과 화친할 마음이 없었다.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한 낙타를 굶겨 죽이기도 했다.

송과의 전쟁을 치르며 뒤통수가 불안하다고 느낀 거란은 고려를 치기로 결심하고 993년 소손녕을 앞세워 1차 침공을 감행한다. 고려는 서희의 담판을 통해 거란에 사대(事大)하고 송과 단절하기로 했고 목적을 달성한 거란은 군사를 물렸다. 송과 거란은 치열하게 싸운 끝에 1004년 ‘전연의 맹(盟)’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송이 연운 16주를 거란 영토로 인정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거란에 보내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거란은 자신을 ‘중국’이라 칭했다.

송과의 전쟁을 끝낸 거란은 사대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등 구실로 고려를 압박해 왔다. 고려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옹립하자 거란은 1010년 2차 침략을 단행했다. 자신이 책봉한 왕을 함부로 죽였다며 거란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다. 항전하던 고려 현종은 결국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피란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 고려 왕이 거란으로 가 황제에게 친조(親朝)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거란군은 물러갔다.

하지만 고려는 현종의 안위 등을 생각해 친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거란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고 고려는 결국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거란은 고려에 거의 매년 소규모 공격들을 계속했다.

그러다 1018년 3차 침공이 시작됐다. 고려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대승을 거두고 거란군을 물리쳤다. 전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매해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조공책봉 관계의 복원을 청했고 거란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는 이후 100여 년의 평화 시대를 맞았다.

거란은 서쪽으로 알타이 산맥, 동쪽으론 동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상·동·중·서·남경 5개의 수도를 두고 유목의 전통에 따라 황제가 계절마다 옮겨 다녔다. 건국 직후 거란 문자를 만들어 자신들의 언어를 지켰다.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속 한 장면. KBS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속 한 장면. KBS

동아시아 패권국이던 거란은 1125년 멸망한다. 거란에 숨죽이고 지내던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나갔고 아골타가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 대금(大金)을 건국했다. 거란은 70만 대군을 이끌고 금을 쳐들어갔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거란은 급격히 쇠퇴했고 금나라는 거란의 상경과 중경을 함락시킨다. 그러자 송이 금에 협공을 제안해 연운 16주를 회복하려 했다. 거란은 두 나라의 양방향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고 결국 달아나던 천조제가 붙잡히며 멸망을 맞았다.

이후 황족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건너가 서요(西遼)를 세우고 금에 저항했다. 하지만 1218년 서요 또한 욱일승천하던 칭기즈칸에 멸망한다. 칭기즈칸은 금과 전쟁을 시작했고 금나라 치하에 있던 일단의 거란인들이 몽골의 지원을 받아 금군을 대파한다. 하지만 거란국 부흥 과정에서 내분이 생겼고 지도자로부터 떨어져나온 수만 명의 분파가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 침입한다.

이들이 고려인에 약탈을 자행하자 고려군이 소탕했지만 국경 바깥으로 도망쳤던 거란인들은 번번이 다시 돌아왔다. 나중에는 평양 근처 강동성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고려까지 쫓아 들어온 몽골군까지 합세해 거란인들을 격퇴했다. 이후 패잔병 일부가 고려에 남았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전국 각지에 ‘거란장’이란 거란인 집단 거주지역을 마련해 살게 했다. 한때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거란의 후손이 지금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