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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한 말은 "담배 주세요" 뿐…이런 청년 54만명 [잊혀진 존재1-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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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립·은둔 청년: 잊혀진 존재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립·은둔 청년이 전국 54만 명, 청년 인구의 5%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중앙일보는 고립·은둔 청년 12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했습니다. 그동안 어디에도 말 못하고 삼키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실은 그 누구보다 세상 밖으로 나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고립 청년 정민호(가명·34)씨가 6일 오후 자택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강정현 기자

고립 청년 정민호(가명·34)씨가 6일 오후 자택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강정현 기자


“하루 종일 내가 하는 말이 ‘담배 주세요’ 한 마디밖에 없구나. 그런 하루가 오늘 만이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그랬구나.”
8년째 은둔 생활 중인 정민호(가명·34)씨는 3년 전 집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 지망생인 그가 6평 남짓 원룸 한켠에 수북이 쌓인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말을 안 했더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표현이 목에서 안 올라와요. 더 이상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어요.” 책장 옆 너덜너덜해진 공책에는 그가 지난 8년간 혼자 글을 쓰고, 고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출판사에 다닐 때만 해도 대화는 정씨의 낙이었다. 상사의 괴롭힘으로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학과 사무실 인턴으로 일하며 주변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밥 먹자고 부르면 나오는 친구들도, 교제하던 애인도 있었다. 그런 그의 삶에서 대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였다. 인턴 계약이 끊기면서 ‘관계 절벽’이 찾아왔다. “2~3년이 지나니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도 다 졸업해 떠났다.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스며들듯 시작된 은둔 생활이 8년째 이어질 줄은 정씨도 몰랐다. 그 사이 우울증·조울증·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수년간 정신과 약에 의존해온 그는 극단적 선택을 상상한 날도 많았다. “남들이 ‘쟤는 왜 저래’라고 생각한다고 느낄 때 심리적으로 더 격렬한 반응이 일었다.”

고립 청년 정민호(가명·34)씨가 6일 오후 자택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강정현 기자

고립 청년 정민호(가명·34)씨가 6일 오후 자택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강정현 기자

고립 위기 청년 54만 명…전국 첫 실태조사 발표

 정씨 같은 은둔청년을 포함한 고립 위기 청년은 전국에 54만 명에 달한다. 전체 청년 인구의 5% 수준이다. 보건복지부는 7~8월 전국 단위 고립·은둔 청년만을 타깃으로 한 실태조사를 진행해 13일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19~39세 청년을 대상으로 온라인 심층 조사를 시도해 2만 1360명이 응답했다. 실태 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의 61.1%는 사회로부터 단절된 지 1년이 넘었다. 고립된 지 10년이 넘었다는 응답자도 6.1%였다.

고립·은둔 청년 문제는 특정 계층·성별 이슈라기 보다는 사회 전반 걸친 문제라는 게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생활을 시작할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고립된 이들이 약 70%로 가장 많았다. 학력 수준은 대졸(75.4%), 고졸(18.2%), 대학원 이상(5.6%), 중졸 이하(0.8%) 등의 분포를 보였다. 여성의 비율(72.3%)이 남성(27.7%)보다 약 2.6배 높았지만, 조사의 책임연구원인 김성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여성이 남성보다 고립·은둔에 대한 자각이 높거나 긴 응답을 완료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을 뿐, 실제 성비는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고립을 방치하면 더 큰 단절로 이어졌다. 초고위험군 504명(2.4%)은 ‘자기 방 안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방에서는 나오지만 집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이들은 1359명, 정씨처럼 편의점 등에 짧게 외출하는 이는 3674명으로 조사됐다. 10여 년째 은둔 생활 중인 박수빈(가명·30·여)씨는 초고위험군 은둔 청년이다. 부모에 대한 반감이 심해 거실로도 잘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게임을 하거나 SNS(소설네트워크서비스)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대학 입시 실패가 은둔의 늪에 빠진 계기였다. 재수 이후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지만 1년 만에 그만뒀다. 박씨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이 아니라 대놓고 실망감을 표현했다. 자책감이 들어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고립된 청년들은 주로 OTT 등 동영상 시청(23.2%), 온라인 활동(15.6%)으로 시간을 보냈다. 온라인·모바일 게임은 이들 중 여성(9.9%)보다 남성(21.5%)의 삶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정폭력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겨 8년째 은둔 중인 강민준(가명·28)씨는 “서른이 돼가는데 해놓은 건 없고 스펙도 없다. 할 줄 아는 건 컴퓨터 게임밖에 없다. 하루에 10시간씩 게임을 하다 보면 외로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님이 서른이 되면 독립하라고 하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면 자살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고립 청년 강민준(가명·28)씨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사당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장서윤 기자

고립 청년 강민준(가명·28)씨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사당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장서윤 기자

은둔할수록 늘어나는 ‘극단 선택’…위험 신호

 완전 은둔 생활을 하며 집 밖에 나오지 않는 이유진(가명·26·여)씨는 어렵사리 전화에 응했다. 이씨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옷걸이, 청소기로 많이 맞았고 다른 가족도 이를 제재해준 적이 없다”며 “지금도 누가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렵다”며 흐느꼈다. 약 10년간 우울증과 불면증, 폭식증을 앓아 지금도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힘겹다고 한다. 이씨는 “당장 죽어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점점 살아갈 용기를 잃게 한다”고 말했다.

고립·은둔 청년 4명 중 3명(75.4%)이 자살 생각을 한 적 있다는 사실도 이번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고립·은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에 대한 생각도 커졌다. 고립 기간이 3개월 미만인 경우 자살 생각률이 64.3%였지만, 고립 기간이 10년이 넘은 청년들은 89.5%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자살 시도까지 이어진 경우도 4명 중 1명(26.7%)꼴이었다. 민간 지원 단체 사단법인 씨즈 김영호 총괄팀장은 “안부를 확인하던 청년이 약물로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입원한 경우도 있다. 다른 기관의 의뢰를 받아 한 청년을 찾아갔는데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고립·은둔 청년 절대 다수는 건강에도 취약했다. 56.1%가 신체건강 문제를, 63.7%가 정신건강 문제를 호소했다. “미래에 희망이 없다”(66.3%)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62%)며 심리·정서적 불안에 떠는 이들이 절반을 훌쩍 넘겼다. 한 응답자는 주관식 문항에 “세상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편의점에 갈 때도 항상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적었다. 정민호씨는 “얼마 전에도 횡단보도를 건너다 달려오는 차량 운전자와 싸울 뻔했다”며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취약해졌다. 별것 아닌 상황에서도 분노 스위치가 켜진다”고 말했다.

이번 실태조사를 맡은 책임연구원 김성아 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주관식 응답에 ‘제발 살려 달라’고 적은 청년들도 있었다”며 “고립 청년 문제는 청년 자살, 고독사 등으로 이어진다. 사회 전반적인 활력이 떨어지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점차 빈곤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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