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경제는 유통이라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44년 전 오늘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듬해 5월 광주를 폭력으로 진압하고 8월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11대 대통령이 된다. 5공 독재가 한창이던 1982년,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가 터진다. 그 주인공 장영자의 어록 “경제는 유통이다”라는 말이 한동안 회자했다. 그의 말처럼 경제는 막힌 곳 없이 흘러야 하고 돈은 돌아야 한다. 어딘가에서 막혀 흐르지 않으면 반드시 사달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촌철살인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요소수 사태도 유통이 막혀서다. 2년 전 요소수 대란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국발 요소수 부족 사태가 재연될까 불안했다. 일단 정부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중국 이외의 3국에서 물량을 추가로 확보해 재고와 중국 외 수입 예정물량을 3개월분에서 4.3개월분으로 늘려놓았다.

‘장영자 명언’처럼 경제는 흘러야
요소수 국내 생산도 결국 돈 문제
“자유무역이 친환경” 새 흐름 주목

예측 불가능한 중국의 수출 통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이참에 아예 요소를 국내에서 생산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 요소는 우리가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다. 1960년대 세계 최대의 요소 공장이 한국에 있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이 1967년에 세운 한국비료공업의 울산 공장이다. 식량이 곧 안보였던 시절, 요소비료 생산은 이 회장의 사업보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프타에서 요소를 만드는 우리 방식은 값싼 석탄을 활용하는 중국산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비료의 후신인 삼성정밀화학(현재 롯데정밀화학)은 2000년대 들어 요소 공장의 적자가 커지자 2011년 사업을 접었다. 중국 이외의 제3국 수입처를 확보하는 것도, 국내 생산을 재개하는 것도 결국 돈이 문제다. 중국산보다 비싸게 들여오는 수입물량에 보조금을 주는 게 돈이 덜 들고 효과적일 수 있다. 전략품목의 안정적인 조달과 비용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경제는 유통’이라는 시각으로 요즘 국제무역을 보면 참 한심할 거다. 미국 등 주요국들이 보호무역과 산업정책에 거리낌이 없다. 미국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대표적이다. 자유무역의 모범생이자 수혜자였던 우리로선 곤혹스러운 흐름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자유무역론자와 환경론자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최근 기사에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리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 분위기를 전했다.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때는 ‘시애틀 전투’라고 불릴 정도로 환경론자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2년 전 영국 글래스고 COP 기후회의나 이번 두바이 회의에선 WTO가 다른 대접을 받았다. 특히 이번 회의에선 처음으로 ‘무역의 날’ 행사가 열렸고, WTO는 자유무역이 녹색 전환을 어떻게 가속화할지 역설했다.

보호무역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환경에도 좋지 않다. 요소수처럼 더 먼 곳에서 수입해야 하니 화석연료를 그만큼 더 써야 한다. 당장 물류비가 비싸지고 생산원가도 높아진다. 보호무역 조치로 재생에너지 설비는 원유 관세의 4배인 3.2%의 평균관세를 물고 있다. 전기차 관세는 일반차보다 1.6~3.9%포인트 높다. 자국 자동차부품 우대조치 같은 비관세 장벽 탓에 자국 생산비는 올라가고, 친환경기술의 확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한 공급망 충격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외부 환경이다. 우방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흔들리고 쪼그라드는 자유무역을 복원하는 국제적 노력에도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자유무역의 원칙을 꾸준히 옹호하는 나라여야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보수의 주장인 자유무역론과 흔들리지 않는 진보의 요새였던 환경론이 한 배를 탈 수도 있다. 12·12 쿠데타처럼 하루아침에 딴 세상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