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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불수능’은 저출산 공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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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시대인재’에 딸의 재수를 맡겼던 후배 기자가 “1년에 3000만원 넘게 들었다”고 말했다. 시대인재는 최근 수년 새 급성장한 학원이다. 그가 말한 3000만원은 딸이 그곳 재수종합반에서 공부하는 데 든 비용을 말한다. 종합반 과정은 통상 9개월가량이니 매달 약 300만원을 지불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인터넷에 올라온 이 학원 출신 청년들의 글을 보니 기본이 월 200만원이다. 학원에서 파는 문제집(이 학원에선 이를 ‘콘텐츠’라고 부른다)을 얼마나 샀느냐에 따라 총비용이 달라진다.

시대인재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교육 카르텔 척결’ 지시로 벼락을 맞은 곳이다. 지난 반년간 다양한 조사와 수사를 받았다. 대표적 문제 학원으로 거론됐다. 그런데 2024학년도 수능시험 만점자와 최고 득점자(이 둘이 다르다는 게 한국 입시의 복잡성을 상징한다)가 이 학원에서 나왔다. 둘 다 재수생이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나쁜 학원의 대표격으로 지목됐는데, 입시에선 성공했다. 이 학원 수강생이 되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는 말이 들려온다.

어려운 수능에 재수학원  초호황
‘변별력=인재 육성’ 맹신 버리고
수능 도입 때 정신으로 돌아가야

이번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이었다. “킬러 문항 빼라”는 대통령의 불호령에 초고난도 문항은 거의 사라졌으나 중고난도(정답률 30%대) 문항이 많았다. 입시 학원 분석에 따르면 58개(2023학년도 수능)에서 93개로 증가했다. 모의고사에 킬러 문항을 넣어 대통령 지시를 깔아뭉갰다는 이유로 교육부 국장이 하루아침에 잘렸으니 출제자들은 어떻게든 초고난도 문항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수능이 너무 쉬우면 입시 혼란이 온다는 전문가와 언론의 경고가 있었다. 그 결과가 학원가에서 ‘준킬러’라 부르는 중고난도 문항 증가였다.

일반적인 중고난도 문항을 만드는 방법은 선지(選支)를 복잡하게 구성하고 ‘매력적인 오답’을 여러 개 넣는 것이다. 지문은 교과서나 EBS 교재에 있는 것을 옮겨다 쓰면서 문제를 알쏭달쏭하게 만들면 겉으론 평이해 보이나 실제로는 까다로운 문항이 된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문제풀이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니 N수생이 유리하다. 이리저리 꼬인 문제를 무수히 풀게 하는 학원이 입시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가 된다.

원론적으로 ‘쉬운 시험=좋은 시험’은 참이 아니다. 공부 많이 한 학생과 덜 한 학생의 점수가 비슷하면 평가 공정성이 의심받는다. 실수 한두 개로 낙오자가 되는 억울한 수험생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어려운 시험=좋은 시험’도 아니다. 시험에만 매달리는 학생과 학부모, 아예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을 양산한다. 입시 때마다 ‘적절한’ 난도에 대한 주문이 쏟아지는데, 입찰에서 낙찰가를 맞히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시험의 변별력이 커야 학생들이 앞서가려고 노력하고, 그 경쟁이 인재를 만들며, 그래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게 이 사회가 오래 간직해 온 ‘발전 문법’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불과 두 세대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됐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젊은이들이 출산을 기피한다. 지구촌에서 압도적 출산율 꼴찌인데, 반등은커녕 악화일로다. 급기야 뉴욕타임스(NYT)에 ‘한국은 사라지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칼럼이, 그리고 한국은행 보고서가 ‘경쟁 압력’을 한국 저출산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다. 어렸을 적부터 겪어 온 경쟁에 지쳤고, 그런 삶을 고스란히 답습할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젊은이가 많다는 이야기다.

저출산 현상엔 고용·주거·육아·교육 등 여러 방면의 문제가 얽혀 있다. 말로만 걱정해야 소용이 없다. 뭔가를 해야 한다. 나라가 없어진다고 하지 않나. 수능의 변별력이 낮으면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기 어렵다는 걱정이 있다. 면접 영향력을 키우면 된다. 이게 수능 도입 때의 본래 계획이었다. 지난 30년간 수능은 줄기차게 변질했고, 나라 전체가 ‘잔인한 입시 경쟁’(NYT 표현)의 포로가 됐다. 변별력 맹신이 만드는 불수능은 저출산 망국의 공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