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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주면 자립? 물어볼 어른 없어 힘겨운 시설 퇴소자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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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호 10면

자립준비청년 보호망 구멍

“의존할 줄도 모르니 ‘진짜 나 혼자구나’ 생각했다.”

아동육아시설에서 퇴소한 지 올해로 7년차가 된 박강빈(25)씨는 최근에서야 ‘자립’에 대한 정의를 마쳤다. 4살에 보육원에 입소해 빨간 보육원버스를 타고 등하교 하던 때 박씨는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마냥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며 “그러다 선배, 선생님을 만나 부족한 건 도움을 받고, 할 수 있는 건 해내면서 점차 ‘자존’, ‘자립’의 상태가 돼 갔다”고 고백했다. 퇴소 후 박씨는 2019년부터 지급된 자립수당부터 주거지원 등 지원책의 변화를 몸소 체감해왔다. 그는 “지원규모는 커져 가지만, 자립의 의미는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홀로 서게 하기’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정선욱 덕성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립의 전제조건은 충분한 의존”이라며 “유년기 시절부터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한데, 지금의 정책은 그런 중간과정 없이 ‘보호종료’ 이후 지원에만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최근 보호종료 5년 이내 자립준비청년은 누적 1만명이 넘었다. 자립준비청년은 보육원·공동생활가정·위탁가정 등 시설에서 살다 독립한 청년으로, 보호종료 연령인 만 18세가 끝나면 독립해야 한다. 지난해 6월부터 24세까지 보호연장이 가능해졌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보호종료 5년 이내 자립준비청년 수는 지난해 1740명, 올해까지 누적 1만1403명이다.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지원은 늘고 있다. 먼저 자립준비청년에게 ‘종잣돈’과 같은 자립정착금은 대폭 상향됐다. 자립준비청년이 가장 많은 서울시는 지난해 1000만원에서 올해는 1500만원으로 늘렸다. 지자체별로 상이하던 자립수당 역시 상향 평준화됐다. 매달 지급되는 자립수당은 2019년 30만원에서 올해 40만원, 내년엔 50만원으로 인상될 예정이다. LH지원 등 주거지원 수혜비율도 늘었다. 2017년 퇴소 청년의 39%가 수혜를 받았다면 2021년 65%로 확대됐다.

문제는 자립준비청년은 아직 독립할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몰라도 물어볼 ‘어른’이나, 자립을 위한 사전 준비가 없다. 이소은(가명·20)씨는 만 18세가 되자 독립의 부푼 꿈을 안고 LH전세자금 지원을 받아 집을 구했지만, 나중에 전담기관 선생님을 통해 부동산없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전자립지원전담기관 전담인력인 윤진 사례관리사는 “반전세로 계약해 월세를 3배 부풀려 받고는 웃는 얼굴로 깎아주는 거라 하는데, 사회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은 믿을 수 밖에 없다”며 “시세도 모르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보니 발생한 일”이라고 말했다. 촘촘한 지원체계 없는 경제적 지원은 ‘돈만 주면 끝나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자립의 첫 걸음인 취업도 쉽지 않다. 자립준비청년은 일반청년과 달리 취업 유예기간을 두기 어렵기 때문에 빨리 취직이 가능한 임시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마저도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는 사례가 많다. 실제 보호종료아동의 실업률은 16.3%로 일반청년보다 7.4%포인트 높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무조건 풀타임 취업이 아니라, 단계적 직업훈련을 통해 적응해가며 상승이직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지원책의 빈틈 탓도 있다. 3개월 인턴십 제도인 ‘일 경험’은 지원 시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기다보니 아예 시도조차 않는 경우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정서적 지지체계는 부실하다. 자립준비청년에게 10회 전액 무료로 우선지원하는 청년마음건강지원사업이 대표적이다. 윤진 사례관리사는 “올해 하반기에 지원을 받게 해주려고 신청하려 했지만 이미 상반기 예산이 소진돼 신청이 마감 됐다더라”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보호종료아동 2명 중 1명은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아예 ‘도움이 필요없다(22.2%)’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멘토(15.8%)’를 꼽은 경우가 많았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동일한 상담 프로세스, 중복 콘텐트에 별 도움을 못 느끼거나 본인이 원할 때 받지 못한 결과”라며 “아직 그런 미스매치를 채울 만큼 밀도 높은 서비스가 준비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자립지원 전담인력 정원을 지난해 120명에서 올해 180명, 내년엔 23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자립지원 전담인력은 지원기관에 상주하는 인력이다. 하지만 전담인력 1인당 담당할 청년 수는 70.8명에 달한다. 그나마 있던 인력 중 40%가 퇴사했고, 평균 근속기간은 5개월에 못 미친다.

전문가들은 충분히 의존할 수 있도록 지지체계를 촘촘히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선욱 교수는 “자립의 의미부터 ‘충분히 의존하는 것’으로 먼저 바뀌어야 한다”며 “그런 충분한 의존 지지체계를 만들려면 지금처럼 보호종료 이후부터가 아니라 유년기부터 지원·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보호종료기간을 연장할까 고민하기보다 시설의 중도퇴소자들을 조기발견해 지원망의 구멍을 메우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허민숙 연구관은 “자립준비청년들은 아직도 비빌 언덕이 없다”며 “가정폭력 등 심적 트라우마가 커서 좌절 시 충격이 크기 때문에, 세컨드 찬스라고 하는 재도전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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