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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조희대 법원’ 소명은 사법 정상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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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명수 전임 대법원장 시절에 법원 신뢰 추락

재판 지연과 법관 정치 성향 노출이 주요 원인

야당도 칭찬한 조 대법원장, 법원 바로 세우길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동의안이 어제 국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다. 그는 곧바로 윤석열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아 17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이균용 후보자 임명 동의 부결로 74일 동안 이어진 사법부 수장 공백 사태가 끝났다. 그동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중단됐고, 다음 달 1일에 퇴임하는 두 대법관 후임자 천거 작업도 이뤄지지 못했다.

신임 대법원장 앞에 놓인 당장의 숙제는 원장 부재 때문에 미뤄진 이런 업무지만, 진짜 과제는 지난 6년의 ‘김명수 코트(법원)’가 쌓은 사법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다. 응답자의 81.2%가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에 동의한 여론조사 결과(2021년 데이터리서치 조사)도 있었다. 사법 불신에 부채질한 것은 재판 지연과 판사의 정치 성향 노출이다. ‘지체되는 정의’에 대한 불만과 법관의 편향성이 드러나는 판결에 따른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재판은 1심 판결까지 3년 2개월이 걸렸다. 윤미향 의원 건도 1심에서만 2년 5개월이 소요됐다. 황운하 의원 등이 연루된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도 공소 제기로부터 4년 가까이 되어서야 1심 선고가 이뤄졌다. 황 의원과 윤 의원의 항소와 상고로 형이 확정되지 않아 이들은 내년 5월까지인 국회의원 임기를 다 채울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이 무슨 소용 있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건만 이처럼 재판이 지연된 것이 아니다. 기소 뒤 2년 이내에 1심이 끝나지 않은 ‘형사 장기 미제’ 건은 2018년에 2777건이었는데, 지난해에는 5346건으로 불어났다. 두 배가 됐다. 민사 재판 상황도 비슷하다. 법원으로 간 사건이 갑자기 폭증한 것도 아니고, 판사 수가 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수년 새 이렇게 됐다. 국회와 언론이 무수히 개선을 주문했으나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상황을 방치했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5, 6일에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현재 사법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판 지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원장도 재판을 맡도록 하는 방안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법원장이 솔선수범해 열심히 재판하면 법원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조 대법원장은 판사 증원을 위한 노력도 하겠다고 했다. 판사들에게 과거처럼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세상이 변했다. 정부와 국회가 판사 증원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현직 판사가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는 글을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렸다. 지난 대선 직후 SNS에 이재명 후보의 패배에 울분을 표시하는 글을 쓴 판사도 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한 믿음을 뒤흔든 일탈이었지만, 대법원이 한 일이라곤 ‘엄중 주의’ 처분이 전부였다. 조 대법원장은 청문회에서 판사들의 ‘자기 절제와 균형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 대법원장 청문회는 매우 이례적으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정책 토론회장을 방불케 했다. 재산이나 자녀 관련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다. 야당 의원의 입에서 “인품도 훌륭” 등의 칭찬이 잇따랐다. 조 대법원장은 2020년 대법관 퇴임 뒤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변호사로 활동해 큰돈을 벌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대법원장은 70세까지만 할 수 있어 그는 임기 6년을 채우지 못하고 3년 6개월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금 그의 앞에는 사법 정상화라는 시대적 소명이 놓여 있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시간은 많지 않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