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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난이도 조절 실패 수능, 사교육 의존만 심해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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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문성(왼쪽 첫째)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장이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이번 수능 출제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정문성(왼쪽 첫째)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장이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이번 수능 출제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역대급 ‘불수능’에 강남 학원 영향력 재확인

킬러문항 배제 성급한 발표가 혼란 더 키워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가 나왔다. 이번 수능에서 전 과목 만점자는 단 한 명에 그쳤다. ‘역대급 불수능’으로 불렸던 2022학년도 수능과 같은 결과였다. 선택과목 난이도를 반영한 표준점수로는 생명과학Ⅱ에서 한 문제를 틀린 학생이 최고 득점자가 됐다. 공교롭게도 두 학생은 모두 서울 강남의 유명 입시학원 출신 재수생으로 나타났다. 강남 사교육 업체의 영향력이 여전히 심상치 않음을 방증하는 결과다.

이번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수험생들 사이에선 ‘불수능’을 넘어 ‘용암수능’이란 말까지 나온다. 국어 영역의 경우 표준점수 최고점(150점)은 1년 전보다 16점이나 높아졌다. 수학 표준점수 최고점(148점)도 지난해보다 3점 올랐다. 현재 수능은 문제가 어려울수록 표준점수 최고점이 올라가는 구조다. 그만큼 수험생들이 시험문제를 푸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이다. 영어에선 1등급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부가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영어를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꿨던 취지가 무색해졌다.

수험생 혼란을 부추긴 건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를 내세운 정부의 잘못된 신호였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지시 이후 수험생들은 수능 난이도 예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킬러문항이 없어지면 수능이 전반적으로 쉽게 출제될 것이란 일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렇다고 이번 수능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나올 걸 예상한 수험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6월과 9월의 수능 모의평가도 본시험 난이도를 예상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입시 경쟁이 존재하는 한 시험의 변별력 확보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은 사교육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교육부는 ‘킬러문항 배제하고도 상위권 변별력 높았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이런 식으로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애초에 정부가 킬러문항을 없애려고 했던 건 사교육비를 잡겠다는 의도가 깔렸었다. 그런데 강남 학원가에는 벌써 재수학원 등록을 알아보는 학생이 몰린다고 한다. 정부는 사교육 억제라는 정책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게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결국 지나치게 어려운 ‘불수능’도, 지나치게 쉬운 ‘물수능’도 수험생의 혼란만 키울 뿐이다. 정부는 입시제도와 시험 난이도를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관리해야 한다. 올해처럼 시험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출제 경향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하는 건 금물이다. 무리하고 성급한 개편은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하다. 정부가 조급하게 입시를 개편하려고 할수록 수험생의 사교육 의존도가 더욱 커지는 역설을 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교육당국이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회복해야만 사교육 수요를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