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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전문가 협회의 직역 이기주의 과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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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종류의 직업이 있다. 이에 따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직능단체도 많다. 미용사들은 미용사회를 만들고, 안마사들은 안마사협회를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협회들은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회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협회들의 활동은 필요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협회는 임의 단체이지만, 어떤 협회는 법에서 지정하여 법정 단체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 법정직능단체 의협·변협
회원 기득권 보호만 집착해서야
전문가로서 국가 전체를 살펴야
의대 정원 등에 성숙한 대응 기대

그중 특별한 지위를 가진 법정 단체로 대한변호사협회(변협)와 대한의사협회(의협)를 들 수 있다. 변협(辯協)은 변호사법에 의해 설립된 단체로서 모든 변호사는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변협은 변호사에 대한 징계권을 가지고 있으며, 변협회장은 대법관과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이 된다. 법조계 고위직 임명에 관여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 것이다. 의협(醫協)은 의료법에 의해 설립된 단체로서,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가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다. 의사들의 유일한 법정 단체이기 때문에 국가의 의료정책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의약분업 등 중요한 의료정책을 결정할 때 정부는 의협과 상의하는 과정을 꼭 거친다.

이처럼 변협이나 의협에 국가가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이유는 사회 엘리트인 변호사와 의사가 국가 운영에 전문가적인 도움을 달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변협이나 의협의 활동을 보면 지나치게 자신들의 직역(職域) 이기주의에 빠져 국가 전체에 도움되기보다는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것처럼 비칠 때가 많다. 물론 변협이나 의협이 회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가진 단체가 회원들의 기득권 옹호에 치우쳐 국가 전체의 발전을 저해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한 사례의 예가 로톡에 대한 변협의 태도와 비대면 진료에 대한 의협의 태도일 것이다. 이런 서비스는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시대의 대표적인 플랫폼 사업으로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변협과 의협의 반대 때문에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현직 변호사와 의사의 기득권과 바꿔버리는 셈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기술 발전에 의한 사회 변화를 현재 기득권이 막을 수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들 플랫폼 사업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올 것이고, 그 사이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일반 국민만 피해자가 될 것이다. 게다가 관련 기술개발이 늦어져 국내 시장의 대부분을 외국기업에 내어줄 위험성도 크다.

최근 의대 정원 조정에 대한 의협의 태도도 실망스럽다. 우리나라의 적정한 의사 수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일반 국민도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듯하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80% 정도가 의사 정원 확대에 찬성하고 있다. 사실 연봉 3억~4억 원을 제안해도 지방으로 가는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과학기술자는 “그 정도 대우면 우리 같으면 어떤 오지(奧地)라도 갈 텐데…”라고 푸념한다.

물론 필수 의료나 지방 의료의 문제가 의사 정원 확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협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정원 확대의 낙수(落水)효과로 응급, 외상, 분만 등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분야의 의사 수를 늘린다는 것은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으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 문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의료 수가 조정 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낙수효과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의사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의사 정원 확대와 의료 수가 조정은 다른 이슈이고, 필요하면 동시에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대 정원을 늘리면 과학기술계로의 인재 영입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주장도 반쪽만 옳다. 물론 지금의 의대 선호 현상을 볼 때 단기적으로는 과학기술분야 지원 학생이 줄어들 것이지만, 의사들의 기득권이 줄어들어 직업에 따른 보상 체계가 정상화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인재의 분야별 수급도 정상화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사회의 지도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경우가 많다. 한 예로 해방 후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어 한국 전쟁 시 북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지주계급의 대표 격인 인촌(仁村) 김성수 등은 지주계급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에 찬성하였다. 물론 당시의 사회 환경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기득권 수호에만 집착했다면 토지개혁의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국민은 지금 의협과 변협이 비슷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현안에 좀 더 성숙한 태도로 대응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