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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동유럽의 시대를 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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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올 초에 헝가리의 국립대 총장들이 서울대를 방문하여 들려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헝가리 대학에서 영어 다음으로 인기 있는 외국어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 열풍’이 불고 있다며 한국 대학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싶어 했다. K팝 등 한류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뿐만은 아니다. 취업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한다. 사실 전년 대비 올해 1~9월 한국의 수출액이 가장 많이 증가한 국가는 폴란드와 헝가리였다. 그리고 최근 수년 동안 이 두 국가에 직접투자를 가장 많이 해 온 나라는 한국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도 한국은 비(非)유럽국가 중 최대 투자국이다.

동유럽이 부상하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 27개국 중 11개국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 동유럽 국가다. 이 11개국의 총인구는 1억명 정도로서 전체 유럽연합 인구의 22%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국민총생산은 아직 유럽연합 국민총생산의 11%에 불과하다. 그만큼 성장잠재력이 크다는 의미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보다 효율성이 40% 정도 낮다. 따라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면 그만큼 효율성이 증가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느려 지금도 추격이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선진 동유럽국인 비세그라드 4국(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의 평균 일인당 국민소득은 20년 이내에 스페인 수준을 따라잡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유럽연합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질 것이다.

한국의 폴란드·헝가리 수출 급증
한국은 두 나라 세계 최대 투자국
동유럽 성장 빠르고 중요성 증가
대외 전략의 중요 축으로 삼아야

한국기업이 동유럽에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유럽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동유럽의 인건비는 서유럽의 절반 이하지만 생산성은 70~80%에 달한다. 바로 이 차이가 경쟁력이다. 특히 동유럽의 인적자본은 우수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비세그라드 4국의 평균 인적자본지수는 0.71에 달해 중국(0.65)과 독일(0.75)의 중간이며 스페인(0.73)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월평균 임금은 스페인의 53~75%, 독일의 35~50%에 불과하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월평균 임금은 더 낮다. 이들 국가는 유럽연합에 가입했기 때문에 다른 유럽연합지역과 무관세 무역이 가능하다.

둘째, 중국 투자를 대체하기 위해서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자 거의 모든 산업에 걸쳐 풍부한 인력과 산업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서 철수하려 해도 하나의 투자국으로써 중국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업종과 기술 수준에 따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인도, 동유럽 등으로 생산기지를 나누어 옮길 수밖에 없다. 이중 동유럽은 상대적으로 양질의 인적자본과 산업기반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업종의 투자처가 되고 있다. 이는 주요 생산 품목이 배터리, 전기차, 원자력, 신재생에너지, 전자제품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기업의 동유럽 투자는 중국 리스크라는 미는 힘과 동유럽의 경쟁력이라는 끄는 힘이 합쳐진 결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동유럽은 더욱 중요해진다.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 지대가 된다. 우크라이나 경제재건이 활발해지면서 물류기지가 들어서고 교통망이 확충되는 등 동유럽은 유럽연합국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성장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동유럽과 더욱 깊은 전략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먼저 동유럽을 한국의 연구개발 해외 거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동유럽에는 공학·화학·물리·의학 등 이공분야 인재가 많다. 아울러 낮은 인건비 덕분에 서유럽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각각 19명, 15명으로 합하면 34명이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29명보다도 많다. 특히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서유럽 청년 못지않게 개방적이며 진취적이다.

기업과 한류가 개척한 동유럽을 우리 정부는 국가 전략 차원에서의 국익과 연결해야 한다. 동유럽은 외교와 경제, 안보 측면에서 한국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들 국가와 어떻게 경제적 시너지를 내고 한국의 안보를 강화할 수 있을지 전략을 짜야 한다. 산업과 과학기술 분야별 인재의 수준과 규모를 파악하여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배정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이 지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필자가 만난 동유럽의 정책결정자는 솔직했다. “중국과의 연결은 탐나지만 위험하다. 한국이 내민 손은 안전하면서 매력적이다.” 우리 정부의 동유럽 전략은 무엇인가.

한국엔 중장기 국가전략이 없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다 첨단 제조업 강국이며 세계적 수준의 소프트 파워를 가졌지만 이를 이용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다. 그 때문일까. 향방 없는 배처럼 한국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쏠린다. 이제부터라도 국가전략을 세워가야 한다. 동유럽은 그 전략의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