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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장벽 허문 K무비 전도사…'아빠가 BTS냐' 아들이 놀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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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16면

‘기생충’ 세계에 알린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아빠가 BTS냐고 아들이 놀리더군요.”

영화 ‘기생충’을 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번역가’. 달시 파켓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는 최근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를 찾는 곳이 많아지면서 올해 유독 비행기 탈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 직전에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 콘퍼런스’ 참석차 홍콩에 다녀온 참이다.

국내외 영화계 곳곳에서 그를 원하는 이유는 그에게 붙는 수식어를 통해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영화계에서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 영화를 잘 아는 영화평론가’로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 독립영화의 산실로 여겨지는 들꽃영화상을 만든 ‘독립영화의 후원자’면서, 1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기도 하다.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번역가로서 바쁜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지금 맡은 번역 작업을 마치면 내년 봄엔 온 가족이 미국에서 상봉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밌고 실험적인 작품 절실

24일 오후 달시 파켓 번역가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24일 오후 달시 파켓 번역가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최근엔 어떤 작품의 번역을 맡았나.
“작품명을 언급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고 공개하는 순간 영화가 어느 정도 완성됐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가 번역가들에게 일이 가장 몰리는 시기기 때문에 한 작품만 맡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 번역 수요가 몰리는 이유는.
“매년 5월에 열리는 칸 영화제에 출품하려면 영문 자막 작업을 2월 말까지는 마쳐야 한다. 이 때문에 매년 겨울엔 수업이나 출장을 고사하고 번역 작업에 몰두한다. 재작년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 등을 이렇게 번역했다. 작년엔 5주가량의 기간 동안 5편을 번역했는데,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과 김창훈 감독의 ‘화란’,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이다.”
한주에 한편 꼴이면 일상이 없을 텐데.
“마감이 정해진 일이라 밤낮없이 작업하곤 한다. 밤늦게 까지 번역하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오전 6시에 일어나서 또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는 출장이 많아 아들의 원성이 컸다.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 아들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둘째는 서울에 있다. 번역 작업이 끝나는 2월엔 온 가족에 미국에 갈 예정이다.”
최근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특정 대사보단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의 모든 대사가 내겐 특별하다. 송서래는 중국 교포로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역할을 맡은 배우 탕웨이씨도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서 어색한 느낌인데 표현을 잘 살려냈다. 나 역시 모국어가 영어인 번역가라 그런 느낌을 잘 살려내려 노력했다. 번역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번역가 입장에선 굉장히 재밌는 작업이었다.”
영화 ‘돈의 맛’에 조연으로 출연한 달시 파켓.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돈의 맛’에 조연으로 출연한 달시 파켓.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는 ‘살인의 추억’을 비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대부분과 ‘아가씨’, ‘암살’, ‘국제시장’ 등 많은 영화의 번역을 담당했다. 특히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를 영어로 옮기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다. ‘살인의 추억’에서 주인공인 형사 박두식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를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라고 옮겼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밥이 넘어가느냐는 의미를 ‘너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는 인간이었냐’는 대사에 담은 것이다. ‘기생충’에서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짜파구리’를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ramdong)’으로 번역했다.

헤어질 결심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사 ‘마침내’를 초월 번역했는데.
“어떤 일이 지연되다가 발생했을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평범한 표현은 ‘Finally’지만, 구어체 느낌이 나서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어가 서툰 중국 교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문어체인 ‘At last’로 번역했다. 한국인들도 주로 구어체인 ‘드디어 해냈다’를 사용하지 문어체인 ‘마침내 해냈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사실 원전은 완전 안전하거든요’처럼 언어유희도 살린 번역이 찬사를 받았다.
“까다로운 표현이었다. 원래 대사에선 원전이 안전(Safe)하다는 걸 홍보하는 문구인데, 직역하면 한국어에 담긴 언어유희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Clearly Cleaner Nuclear’로 번역했다. 다행히 좋게 봐주셨다.”

그의 번역은 단어의 맛을 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인만 아는 단어를 그에 상응하는 단어로 번역해내곤 했다. 가령 ‘기생충’에선 학익진을 ‘A cran’s wing formation’으로 번역한 것이다. ‘브로커’에선 극 중 송강호가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인 ‘삼신 아저씨들’을 ‘the Stork twins’으로 번역하며 찬사를 받았다. 한국에선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준다고 믿는 것처럼 유럽이나 미국에선 황새(the Stork)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양쪽의 설화까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간 나올 수 없는 번역이다. 이 때문에 한국 관객들 사이에선 그가 번역한 영화는 영어자막으로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어쩌다 한국 영화에 빠졌나.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1997년 8월인데, 바로 다음 달에 부산영화제가 열렸다. 그곳에선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이 느껴졌다. 당시 한국인들의 영화 사랑은 인상적이었다. 주목할 만한 작품에 계속해서 나오고 극장 주변은 물론, 카페와 길거리에서도 모두 영화 얘기를 하고 있더라. 영화를 안 보는 사람은 얘기할 수 없었고, 영화를 보는 사람은 행복했던 시기다. 특별한 시대였다.”

그의 말처럼 1997년 이후 20여년의 기간은 한국 영화에 있어 ‘특별한 시대’였다. ‘쉬리’(1999)와 ‘친구’(2001), ‘실미도’(2003), ‘올드보이’(2003), ‘추격자’(2008) 등 지금도 명작으로 회자하는 작품들이 줄지어 스크린을 장식했다. 명작들의 계보는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을 전후로 기세가 크게 꺾였다. 올해 상반기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1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는 4편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 영화가 부진하다.
“어려운 시기다. 한국 영화가 25년 동안 계속 성장하면서 제작비나 개봉 규모 모두 커지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관객이 줄다 보니 영화계 모두가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은 한국이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다. 영화계도 얼어붙었지만, 당시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영화에 대한 욕구가 높았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원하는 작품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살인의 추억’이나 ‘지구를 지켜라’ 같은 도전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다. 어렵다곤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절실한 시기다.”

영화 번역은 텍스트만 봐선 안돼

달시 파켓 손 거친 영화 대사

달시 파켓 손 거친 영화 대사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의 약진 때문이란 지적도 있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면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한 지적이다. 미국인들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문화가 강하다. 반면 한국인들은 집이 아닌 외부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일상적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이후에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카페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야기 도중 그는 고개를 들어 인터뷰 장소였던 카페 내부를 둘러보길 권했다. 그의 말처럼 평일 오후의 카페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손님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90년대 달시 파켓 교수가 경험했던 것처럼 영화 얘기를 하는 손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은 콘텐트가 문제란 얘기인가.
“그렇다. 한동안 관객이 당연히 줄어든 이유가 팬데믹 때문이겠구나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 본질의 문제였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에도 실패한 영화도 많았다. 영화가 함량 미달이었다기 보단, 관객들이 보기에 익숙한 소재와 스타일의 영화가 범람하면서 관심이 줄었다. 최근 몇 년간 한국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의 영화가 흥행작의 속편만 나오곤 했다. 안전한 작품만 시도한 것이다. 반면 OTT 서비스들에선 실험적이고 재밌는 작품이 계속해서 나오면서 관심이 쏠렸다. 다시 재밌는 영화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다시 극장을 찾을 것이다.”
최근 추천할 만한 작품은.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를 추천한다.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감독조합-메가박스상을 받은 작품인데, 위로가 되는 영화다. 최근 개봉작 중에선 지난 10월 25일 개봉한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를 추천한다. 젊은 여성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두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번역을 맡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번역가 지망생에게 조언한다면.
“영화 번역은 특별한 번역이다. 배우들이 대사엔 리듬감이 있다. 대사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번역해야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특정 언어를 몰라도 느낄 수 있는 게 많다. 배우 얼굴이나 표정, 목소리 등으로도 분위기가 전달된다. ‘텍스트’에만 집중하다간 놓칠 수 있다. 영화 번역에 관심이 있다면, 다양한 번역을 접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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