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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 경기 즐기기보다 미쳐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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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검을 든 철학자’ 펜싱 대표 구본길

구본길(34)은 ‘어펜저스(펜싱+어벤저스)’의 에이스다. 어펜저스는 세계 최강인 대한민국 남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의 별칭이다. 구본길과 김정환·오상욱·김준호로 구성된 어펜저스는 2020 도쿄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고, 올해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도 석권했다. 항저우 개인전 결승에서는 구본길이 오상욱에 7-15로 져 아시안게임 통산 최다 금메달(7개)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펜싱 마스크를 들고 포즈를 취한 구본길. 그는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박수 칠 때는 더 하는 게 맞고, 떠나면서 뭘 남기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펜싱 마스크를 들고 포즈를 취한 구본길. 그는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박수 칠 때는 더 하는 게 맞고, 떠나면서 뭘 남기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사브르는 펜싱에서 유일하게 찌르기와 베기를 모두 할 수 있는 종목이다. 그만큼 빠르고 격렬하다. 두 개의 올림픽 금메달(2012 런던, 2020 도쿄)을 갖고 있는 구본길은 탤런트 같은 외모와 빼어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네이버에 연재하는 칼럼을 통해 깊이 있는 통찰과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이 ‘핫 피플’을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 성수동에서 만났다. 그의 매니지먼트사인 브리온컴퍼니 사옥에서다. 그는 까다로운 질문에 연륜 담긴 대답을 내놨다. ‘검을 든 철학자’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광저우 대회를 통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했는데요.
“아시안게임 가기 전에 최다 금메달, 아시안게임 4연패 등에 대한 압박이 심했어요. 긴장감 때문에 도망가고 싶고, 차라리 개인전을 안 뛰었으면 싶었죠. 8강에서 거의 진 경기를 이겼고, 맞은편에서 (오)상욱이가 올라왔어요. 결승이 끝나는 순간 정말 후련하더라고요. 딱 끝나고 나서 느낀 게 ‘난 정말 펜싱을 좋아하는구나’였어요. 펜싱에 대한 초심, 첫사랑, 간절함을 다시 찾은 대회였습니다.”

올림픽 금 2, 아시안게임 6개 따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 게 오늘의 구본길을 만들었다고 했는데요.
“제가 말하는 ‘왜’는 무조건 ‘긍정적인 왜’입니다. 코치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라 자신한테 물어보는 거죠.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저는 더 디테일하게 이 동작을 내가 왜 해왔는지 어느 상황에서 해야 되는지 저한테 계속 질문해요. 부정적으로 ‘아니 이걸 왜 해야 돼?’가 아니죠. 주입식 교육이 문제라고 하는데, 누가 주입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남이 주입하느냐, 내가 주입하느냐. 대부분 남이 주입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저는 제 방식으로 필터링을 한 거죠.”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타협하면 요행수·무리수가 나오고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하셨죠.
“펜싱을 25년 했는데 몸의 감각은 정직해서 훈련을 안 하면 떨어지게 돼 있어요. 운동이 하기 싫으면 ‘이 정도면 돼’ 라며 타협을 하죠. 그러면 감각이 떨어지면서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내 전술로 하는 게 아니라 ‘통밥’을 굴리거나 상대 실수를 기대하죠. 상대가 실수를 해도 그걸 받아먹는 과정에서 동작에 무리가 가게 됩니다.”
‘나의 마르셰는 끝나지 않았다’는 칼럼의 표현이 아주 멋진데요.
“마르셰(marche)는 펜싱의 가장 기본적인 전진 스텝을 말합니다. 펜싱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마르셰를 몇 번 했을까요? 100만 번도 더 했겠죠. 후배들이 ‘형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마르셰 몇 번 더 하겠노’ 농담을 합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선수로서 마르셰는 끝나겠지만 저는 지도자든, 행정가든 대한민국 펜싱의 발전을 위해 멈추지 않을 겁니다. 방향만 다를 뿐이지 제 인생의 마르셰는 죽을 때까지 계속 간다는 거죠.”
은퇴할 때가 가까워지면 아무래도 후배 눈치를 좀 보게 되죠?
“톱에 있는 선수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은퇴 시기죠.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쉬운 게 아니에요. 왜 박수 칠 때 떠납니까. 더 해야죠. 문제는 후배에게 뭘 물려줄 거냐 하는 거죠. 펜싱의 기술이나 동작은 사람마다 몸도 타이밍도 달라서 물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운동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고 싶어요. 연습 시작 30분 전에 미리 와서 신발끈을 묶는 모습, 이런 솔선수범을 보여주는 게 선배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구본길이 항저우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전에서 득점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본길이 항저우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전에서 득점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본길은 귀공자 같은 외모와 달리 극한 가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왔다. 어머니 선태복씨는 식당 허드렛일을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그는 ‘내 펜싱 인생의 팔할은 어머니’라고 칼럼에 썼다.

어머님의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나요.
“어머니는 티를 잘 안 내세요. 힘든 것 아픈 걸 꿋꿋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자주 봤거든요. 저도 ‘난 이걸 해내야 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지면서 배우는 게 있다는 말은 저한테는 사치였어요. 지면 끝나는 거였으니까. 그 절박함이 제 성장의 동력이었죠.”
‘경기를 즐겨라’는 말도 많이 하잖아요.
“저는 후배들한테 ‘연습게임에서도 이기는 습관을 들이라’고 합니다. 동작을 익히는 연습에서도 자꾸 찔리면 습관이 돼 버려요. 상대 칼에 찔리는 감각에 익숙해지면 힘든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멘탈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습관을 들이고, 그 다음에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쉽지 않은 주문 같은데요.
“저는 ‘즐겨라’보다는 ‘미쳐라’가 맞는 것 같아요. 미치면 힘든 것도 몰라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거기서 결과가 나왔을 때 그게 진짜 즐기는 거죠. ‘훈련 많이 했잖아. 하던 대로 하면서 즐겨’ 이건 아니죠. 그러면 고비를 못 넘겨요. 미치다 보면 ‘야, 이거 내가 어떻게 이겼지?’ 할 정도로 게임 내용이 하나도 생각 안 나요. 지면? 한 포인트 한 포인트 다 생각이 납니다.”
자식의 큰 경기 앞두고 어머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8배를 하셨는데요. 힘들 때 의지하는 대상이 있나요.
“저희 집안은 불교인데, 운동 하면서 기독교에 빠져 있는 형들도 많이 봤어요. 물론 힘들면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도움을 받고 싶죠. 하지만 저는 제 몸을 믿습니다. ‘가족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같은 소원은 빌 수 있어요. 그런데 몸을 움직여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기에선 누구도 날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신앙이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펜싱의 매력이 뭔지 물었다. 그는 “몸으로 두는 장기나 바둑, 또는 가위바위보 같은 것”이라고 했다. “1대 1로 붙으면 이 안에 무한한 수(手)들이 있죠. 몸으로 수싸움을 하니까 몸도 준비돼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합니다. 이게 맞아떨어져서 상대를 찔렀을 때 쾌감은 정말 짜릿하죠. 펜싱은 ‘칼을 들고 하는 카드 게임’이라고 정의하고 싶네요.”

이긴 경기는 점수 딴 기억도 안 나

취미로 펜싱을 하는 분들이 늘었는데요.
“펜싱은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함께 할 수 있고, 운동량이 정말 많아요. 칼을 써서 위험해 보이지만 보호장구가 있어서 투기 종목 중 가장 안전합니다. 펜싱은 ‘내가 졌다’고 먼저 인정하기 때문에 승복하는 자세와 품격을 수련할 수 있는 좋은 운동이기도 하고요.”
해외 대학 입학 스펙 쌓기로 자녀를 고액 펜싱 클럽에 넣는 경우가 많다던데요.
“펜싱 클럽 하시는 분들이 싫어하실지 모르겠는데요(웃음), 솔직히 펜싱이 아이비리그 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일단 공부를 잘해야 하고, 실력이 비슷하다면 펜싱 대회 입상한 게 어드밴티지가 될 수는 있겠죠.”
펜싱 레전드 출신 남현희씨가 얽힌 대형 스캔들이 터졌는데요.
“펜싱이 올림픽·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인기도 올라가는 중에 터진 일이라 안타까워요. 더 속상한 건 모든 국민이 스포츠인을 다 그렇게 보지 않을까 하는 점이죠. 절대 다수의 스포츠 선수들이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멋지고 모범적으로 하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패션 센스가 남다르신데요.
“와이프가 옷과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저를 많이 꾸며주거든요. ‘이거 입어봐’ 하는데 제 스타일이 아닌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 ‘요즘 유행 좀 아네’ 하는 겁니다. 와이프를 믿은 덕분에 기본은 갖춘 것 같습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스타일도 좋아서 은퇴하면 방송 쪽에서 끌어가려고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은퇴 후에도 펜싱 쪽 일은 계속 할 겁니다. 방송을 한다면 펜싱을 알리는 차원 정도겠죠. 펜싱 동호인대회 우승자가 갑자기 선수촌에 와서 게임을 뛰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신기해서 ‘와, 잘하시네요’ 했더니 ‘저는 국가대표가 될 겁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방송 잘한다’ 소리 들으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건 내 자리가 아니구나. 하하.”

구본길

소속 국민체육진흥공단
출생 1989년 , 대구광역시
체격 182㎝, 70㎏
올림픽 금메달 2012 런던, 2020 도쿄
아시안게임 금 6 (역대 한국선수 공동 1위)
상훈 체육훈장 청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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