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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처럼 차근차근, 늙은 말 지혜로 한국농구 살릴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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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22면

[스포츠 오디세이] 안준호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

안준호 감독은 “뛰어난 선수와 지도자가 되려면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앎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안준호 감독은 “뛰어난 선수와 지도자가 되려면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앎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지금 한국 농구는 백척간두가 아니라 절벽 아래로 떨어져 있어요. 거기서 올라오려면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어요. 우보만리(牛步萬里), 소걸음처럼 느려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이지만 노장의 지혜를 모두 바치겠습니다.”

안준호(67)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프로농구(KBL) 삼성 감독 시절 ‘사자성어 인터뷰’로 인기를 모았던 그에게 대표팀 수장으로서 각오를 말해달라고 했더니 역시 사자성어가 좔좔 쏟아졌다.

안 감독은 지난 연말 남자대표팀 감독 공모에 지원했다. 프로 감독 출신인 서동철(55) 코치와 짝을 이룬 안 감독이 최종 선택되자 “대표팀 감독이 갈 데 없는 지도자 구제해 주는 자리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불과 석 달만에 이런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안 감독은 박무빈(23·모비스) 오재현(24·SK) 등 신예들을 과감히 발탁했다. 귀화 선수인 라건아(36·KCC)를 주장에 선임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세계 51위)은 2월 22일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예선 1차전에서 호주(세계 4위)에 71-85로 역전패했다. 하지만 한때 13점 차까지 리드하는 등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25일 원주에서 열린 2차전에선 태국을 96-62로 크게 이겼다.

“남자농구 회생의 희망이 보인다”며 흥분하는 농구인들을 향해 안 감독은 “이제 첫 발을 떼었을 뿐”이라며 우보만리의 꾸준함을 강조했다. 지난 7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대한농구협회에서 안 감독을 만났다.

어린 시절 한학 배워 사자성어 좔좔

‘원 팀 코리아’를 강조하셨는데요.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농구가 7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냈어요. 그 와중에 축구대표팀 손흥민-이강인 갈등 같은 게 농구 대표팀에서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때는 가슴에 태극기 다는 게 최대 목표였는데 지금은 프로가 생기고 스타 선수들이 부와 명예를 얻다 보니 대표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도덕적인 품위와 책임감, 대표팀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팀 정신이라고 하면 좀 추상적인데, 구체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요.
“농구 경기시간이 40분인데, 코트 안에는 항상 10명이 있어요. 단순 계산하면 한 명이 공을 만질 수 있는 시간은 4분이죠. 나머지 36분 동안 팀을 위해서 어떤 움직임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플레이를 하는 게 팀 정신입니다. 수비하는 동안에는 내 마크맨도 잘 체크해야 하지만 어떤 헬프 디펜스(협력수비)를 하고 어떻게 리바운드에 참여할 것인가 생각해야죠. 공격 때는 내가 어떤 움직임을 해야 동료가 뛸 공간을 넓혀줄 주 있고, 공격을 매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팀 정신을 억지로 주입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당연하죠.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뭔가 이익이 없으면 가기를 싫어하죠. 대표팀에 가면 소속팀에 있는 것보다 열악하고 동기부여가 안 되니 의욕이 떨어지는 거죠. 저는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면서 ‘이번 소집기간 열흘이 지나면 다시 대표팀에 온다는 보장이 없다. 오래 기억에 남을 멋진 추억을 만들어보자. 전리품을 줄 수는 없지만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뜨거운 장면을 만들자’고 감성적으로 접근했어요.”
선수 선발의 기준은 뭡니까.
“어느 조직이든 최고 명문대 출신이나 스펙 좋은 사람만으로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어요. 궂은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박무빈·오재현·한희원을 처음으로 발탁했죠. 기존 대표선수들이 다 놀라요. ‘전에는 공격 잘 하는 선수만 뽑았는데 이번 코칭스태프는 다르네’라고요. 자연스럽게 팀 정신이 생기도록 하는 거죠. 농구는 코트 안에서는 다섯 명이 하지만 12명 엔트리 전원이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어요.”
본인이 추구하는 농구 색깔은?
“한국은 국제대회 나가면 거의 최단신 팀입니다. 키 작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우리의 장점인 빠른 스텝을 이용해 40분 내내 풀코트 강압수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른 공격 전개와 세밀한 조직 플레이로 코트를 뒤집어버려야 합니다. 종료 버저가 울리면 탈진해서 모두 쓰러질 정도로 뛰어야죠. 단신의 핸디캡을 메우고 한국 특유의 농구로 무장하기 위해 더 많이 준비하고 고민할 겁니다.”
안준호 감독이 2월 25일 열린 태국과의 경기에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뉴스1]

안준호 감독이 2월 25일 열린 태국과의 경기에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뉴스1]

안 감독은 고1 때 농구에 입문한 늦깎이다. 피나는 노력과 근성 넘치는 플레이로 국가대표까지 성장했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우승 멤버가 됐다. 프로농구 삼성 감독 시절 7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고, 세 번 챔프전에 나가 한 번 우승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국체대에서 스포츠교육학 박사과정을 밟았고, 모교 경희대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귀화선수 세심하게 배려하는 게 중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뭔가요.
“신뢰죠. 선수들은 ‘감독이 나를 도와주고 성장시키려고 한다’는 믿음이 있으면 몸을 던집니다. 삼성 감독 때 아무리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도 부상 중인 선수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재활 잘 하고 있나’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선수는 스트레스 때문에 회복이 늦어집니다. 트레이너로부터 ‘경기 나갈 준비가 100% 끝났습니다’는 보고를 받아야 그 선수를 불러들였죠. ‘진통제 투혼’으로 한 경기 이겼다고 해도 선수가 2~3년 후유증으로 고생한다면 그건 감독이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이죠.”
최근 농구의 큰 변화는 뭔가요.
“농구가 다국적기업처럼 됐다는 겁니다. FIBA 주관 대회에서 엔트리 한 명은 귀화 선수를 쓸 수 있게 했어요. 농구가 미국 중심에서 전 세계로 나가려면 수준이 상향 평준화 돼야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귀화 선수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라건아를 옥구슬처럼 귀하게 모셔야 합니다. 귀화를 생각하고 있는 선수들이 모두 그를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 농구를 위해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모두 쏟아 붓겠다고 했다. “내년 8월에 열리는 아시아컵에 출전하고, 거기서 FIBA 월드컵 티켓을 따야 합니다. 남자농구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겠습니다. 화살은 제가 맞고 영광은 선수들이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 감독 “내가 있는 동안은 라건아가 농구 국대 캡틴”

라건아

라건아

미국 이름이 리카르도 라틀리프인 라건아(사진)는 미국 농구명문 미주리대를 졸업한 뒤 KBL에 곧바로 뛰어들어 13년간 한국에서 생활했다. 2018년 귀화한 이후 7년 동안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다.

안준호 감독은 대표팀에서 가장 나이도 많고 전력의 핵인 그에게 ‘원 팀 코리아’의 상징적인 포지션을 맡기기로 했다. 그의 감정 기복으로 인해 팀 전력의 누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포석도 있었다.

안 감독은 대표팀이 첫 소집한 지난달 16일 라건아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스포츠 팀에서 캡틴을 했다는 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영광스러운 커리어다. 더구나 내셔널 팀의 캡틴은 말할 나위도 없다. 너에게 이런 큰 선물을 하고 싶다. 캡틴은 감독을 대신해서 선수를 아우르고, 선수의 좋은 의견을 코칭스태프에게 전달하는 자리다. 난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라건아는 “태어나서 주장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런 큰 역할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며 수락했다.

안 감독은 팀 내에서 라건아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김종규(34·DB)에게 “라건아가 커뮤니케이션이 100% 안될 수 있으니 네가 잘 도와줘라”고 당부했다.

첫 연습이 끝난 뒤 라건아는 선수들을 모이게 한 뒤 “내가 주장을 맡았다. 많이 도와 달라. 함께 잘해보자”고 했고, 선수들은 박수와 환호로 새 주장을 환영했다.

아시아컵 1라운드 소집기간이 끝나는 날 안 감독은 다시 라건아를 불렀다. 그리고는 “주장 역할을 잘해줘서 고맙다.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은 네가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의 캡틴이다”고 믿음을 심어줬다. 라건아는 환한 웃음으로 감독의 신뢰에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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