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플라스틱통 2개 들고선…자승 스님, CCTV에 찍힌 마지막 행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스님이 지난 2월 인도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대법회에서 발언한 모습. 자승 스님은 지난 29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화재 현장에서 입적했다. 사진 연합뉴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스님이 지난 2월 인도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대법회에서 발언한 모습. 자승 스님은 지난 29일 오후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화재 현장에서 입적했다. 사진 연합뉴스

경찰이 29일 안성 칠장사 화재 현장에서 입적한 자승 스님(69)의 마지막 행적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들을 확보해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 여기엔 자승 스님이 칠장사 요사채(스님들의 숙소)에 도착해 휘발유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스틱통을 직접 옮기는 모습 등이 담긴 것으로 파악됐다.

경기남부경찰청과 안성경찰서에 따르면, 자승 스님은 이날 오후 3시 11분쯤 검은색 승용차로 칠장사를 찾았다. 운전은 직접 했고, 동승자도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칠장사 주지인 지강 스님은 자승 스님을 맞이하고 대화를 잠시 나눈 뒤, 요사채 문을 열어 주고 사찰 내 다른 장소로 떠났다. 이후 자승 스님은 오후 4시 24분쯤 차에서 휘발유가 담긴 걸로 추정되는 플라스틱통 2개를 들고 요사채로 들어갔다.

1분 만에 다시 밖으로 나온 자승 스님은 요사채 바로 옆에 주차돼 있던 차를 뒤편으로 이동 주차한 뒤, 1시간 넘게 요사채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5시 54분쯤 밖으로 나온 뒤 2분여간 외출을 마치고 요사채로 들어갔다. 화재가 있기 7분여 전인 오후 6시 36분쯤 요사채 문을 열고 잠시 밖을 내다본 것이 마지막으로 CCTV에 담긴 모습이었다. 이후 오후 6시 43분쯤 내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경찰 관계자는 “CCTV 영상 화질이 높은 편이라, 이날 오후 자승 스님의 행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담겼다”며 “외부인의 침입 흔적 등 특이사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타살이나 방화 등을 의심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이 머문 요사채(스님의 거처) 소실 전 모습. 사진 독자 제공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이 머문 요사채(스님의 거처) 소실 전 모습. 사진 독자 제공

대한불교 조계종도 이날 “오후 자승 스님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분신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조계종 대변인인 총무원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종단 안정과 전법도생을 발원하면서 소신공양 자화장으로 모든 종도들에게 경각심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불교에서 스스로의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조계종은 자승 스님이 “생사가 없다 하니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라는 열반게(스님이 입적 전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남기는 말이나 글)를 남겼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남은 의혹들… 경찰 “모든 가능성 수사”

그러나 자승 스님의 입적과 관련한 의혹들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불교계 안팎에서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입적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 27일 교계 언론사 기자 간담회에서 “대학생 전법에 10년간 모든 열정을 쏟아붓겠다”고 밝힐 만큼 강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입적한 동기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불교도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조계종의 한 사찰에서 30년간 주지로 있는 스님은 “불교계 실세 중 실세인 데다, 스트레스 내성이 강한 분으로 알고 있어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30일 칠장사를 찾은 한 스님은 “지난해 자승 스님이 죽음과 삶의 문제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의 차량에서 발견된 메모 형식의 유서 2장이 발견됐다. 사진은 그중 하나로 필적 감식이 예정돼 있다. 다른 유서에는 "지강 주지스님. 이곳에서 세연을 끝내게 되어 민폐가 많소. 이 건물은 상좌들이 복원할 겁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독자 제공

29일 입적한 자승 스님의 차량에서 발견된 메모 형식의 유서 2장이 발견됐다. 사진은 그중 하나로 필적 감식이 예정돼 있다. 다른 유서에는 "지강 주지스님. 이곳에서 세연을 끝내게 되어 민폐가 많소. 이 건물은 상좌들이 복원할 겁니다. 미안하고 고맙소.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독자 제공

자승 스님의 차량에서 발견된 유서 추정 메모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의혹도 아직 남아있다. 노란 종이 메모 2장에는 입적 동기나 교계 및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대신, “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스스로 인연을 달리할 뿐인데 CCTV에 다 녹화되어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선 타살설 등 여러 음모론이 떠돌기도 했다. 불교 철학을 전공하는 한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살할 것이라면 왜 며칠 전까지도 대학생 전법을 운운했겠냐”고 적었고, 한 문인은 “화재 당시 칠장사 경내에 있었다는 승려 4명의 소재를 추적 중이라고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계종 측은 “(CCTV를) 확인한 결과 사실과 다르며, 자승 스님께서 혼자 입적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화재 발생 당시 사찰 내에는 자승 스님 외에 지강 스님과 60대 경비원, 재무 보살 등 세 사람이 더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이들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했지만, 별다른 범죄 관련 혐의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자승 스님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추정되는 지강 스님은 “자승 스님이 종종 칠장사를 찾았다. 나머지는 종단에서 밝힌 내용이 전부”라며 말을 아꼈다.

30일 오전 경기도 안성 칠장사 입구.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의 사망 소식에 현장을 찾은 경찰, 취재진, 불교도 등으로 붐볐다. 사진 손성배 기자

30일 오전 경기도 안성 칠장사 입구.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의 사망 소식에 현장을 찾은 경찰, 취재진, 불교도 등으로 붐볐다. 사진 손성배 기자

다만 경찰은 여러 의문이 제기되는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화재 현장 정리가 완료된 30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반 동안 소방 당국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현장 감식을 진행했고, 유서 추정 메모에 대한 필적감정도 진행한다. 또 정확한 신원과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DNA 감정과 부검 결과 등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정보원도 경찰과 별도로 현장 점검에 나섰다. 국정원 관계자는 “불교계 유력 인사가 사망한데다, 사찰 화재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며 “경찰 수사와 별개로 테러와 안보 위험 여부를 확인하는 차원의 조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한편, 칠장사는 종일 경찰과 취재진, 인근 주민과 불자들로 붐볐다. 내부 출입은 경찰이 통제했지만,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불자들은 멀 발치에서나마 비탄에 빠진 스님들을 위로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스님들도 칠장사를 찾았다.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성우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 초석을 놓은 큰스님이 열반하셔서 황당하고 슬프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