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공부] 공신 논술의 왕도를 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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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대 공학관에 모인 서울대생 선배들이 ‘사교육보다 더 생생한 논·구술 체험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김지훈·강성태(공신 대표)·유상근·서형일·신재승. [김성룡기자]

"수능 못 봤다고요? 위축되지 마세요. 논술이란 백지수표가 있잖아요. 백지에 자신의 합격 가능성을 서술해 나가는 거죠. 시험지는 다른 전형요소를 뒤집을 수 있는 신나는 도화지인걸요."
서울대 외교학과 김지훈(26)씨. 이렇게 말하는 그도 대학 입학 시험까지 모두 다섯 번의 논술을 써본 게 전부다. 그러나 뜻밖에도 생애 최초의 논술을 쓴 고3 때 연세대 주최 전국 중.고등학생 논술경시대회 금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교육부 주최 논술대회 은상 등 네 번의 논술대회상을 휩쓸고 대학생 안보토론대회에서 최우수상,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논문 A+까지 그의 논술 고공행진은 이어졌다. 26일 서울대 공학관에서는 김씨를 비롯한 '공신' 동아리 회원 10여 명이 모여 따끈따끈한 논.구술 체험담을 나눴다. '공신'은 고교생 후배들에게 공부 방법을 알려주는 서울대생 주축의 학습 동아리. 이들은 다음달 2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고교생을 모아놓고 자신들의 비법을 전해 주는 '논술 특강'을 할 예정이다.

논술 TV를 내쫓으세요, 상상력이 돌아옵니다

▶김지훈(외교학과 99)=사교육을 안 받았지만, '김지훈표' 논술연구소는 중학교 시절 차렸어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부모님이 사교육비로 주신 30만원짜리 봉투가 아까워진 거죠. 그 돈으로 책을 사 보기로 했어요. 30만원으로 3년동안 책을 사면 한 권에 1만원으로 쳤을 때 1000권이에요. 그 안에서 찾지 못할 지식이 없어요. 빌 게이츠가 탐독했고 오늘날 상상력의 기원이 됐다던 꿈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샀으니까요. TV도 치웠어요. 대신 나만의 논술연구소를 차렸죠. 내가 고른 엄선된 책들이 분석돼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논술에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담기게 됐죠.

시중의 '모범 답안'과 '현장 답안'을 구별해야 해요. 대형 학원에 앉아 주입식 지식을 받아먹는 건 '평균점수에서 아둥바둥하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지요. 그래서야 채점위원인 교수를 낯설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현장 답안에선 현학적인 표현, 나만이 아는 용어는 빠집니다.

수행평가 등 평소 글을 쓸 때부터 창의력 훈련을 하세요. 그 훈련은 대학에 가서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저는 '최치원의 삶과 문학'에 대해 리포트를 쓸 때도 관련 도서를 찾아쓰는 논문 형식이 아니라, 최치원이 울창한 숲 합천 해인사에서 쓴 시를 따라 직접 그곳으로 가서 사진과 함께 기행문 형식의 글을 써서 인정받았습니다.

논술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신문을 챙기세요

▶박상원(인문계 06)=학원에서 사회과학 이론을 써먹으라고 가르쳐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잘못된 인용을 1대1로 갖다 쓰면 논점에서 이탈하기 쉬워요. 차라리 사회교과서를 펴고 재밌는 얘기를 되새기는 게 낫죠. 2006학년도 정시문제인 경쟁에서의 공정성과 결과의 정당성을 봅시다. 80% 학생이 씀직한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는 쓰지 않았어요. 우화로 시작한 2004년 서울대 논술모의고사 예시답안이 돌면서 학원에서 "우화로 서두를 열라"고 가르쳤거든요. 대신 칼 포퍼의'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예로 들었어요.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건 검증이 아니라 반증 가능성이다'를 응용해, 경쟁이 초래할 반증 가능성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썼어요.

▶유상근(인문계 06)=고3 수험생의 경우 논술 시험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지만 샛길은 없어요. 학원을 가면 다이제스트판 읽기 자료를 줘요. 저는 많은 것을 보지 않은 대신 소수의 원서를 읽었어요.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시리즈가 기억에 남아요.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논하란 면접에선 당시 논쟁이던 '가수 카우치 노출 사건'을 예로 들었어요. 인디밴드 문화의 속성을 프로이트 이론에 적용시켜, "욕망이 억압되면 괴물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생방송 노출은 도덕적으로 나쁘지만 욕망의 억압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죠. 아마 '꿈의 해석'을 다이제스트로 읽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구술 장황한 설명 NO! 고쳐야 할 열 가지 만드세요

▶이선경(연세대 상경계 07 예정)=면접은 저를 마케팅하는 시간이에요. 저는 아프리카에 봉사를 갔다 온 경험을 최대한 살렸어요. 미국의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서는 넬슨 만델라처럼 순응하지 않고 30년을 감옥에서 신념을 굳혀왔던 사람을 지지한다고 얘기를 풀어나갔죠. 또 제가 택한 국제경제학 전공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을 들면서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과 우리의 기술을 긴밀히 교류해 '윈윈 전략'를 펼치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어요.

자신감이 중요해요. 아직 학문적으로는 준비가 덜 돼도, 공부 열의는 교수 못지않다는 인상을 주는 게 좋죠. 일주일 전 친구들과 빈 교실에 모여 모의면접을 하고 MP3에다 녹음을 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하거나 말문 막히면 웃느냐''허리 숙이니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장황하다'란 비평을 받았어요. 수첩에 '이것만은 하지 말자'를 10개로 추려 면접장에 들어갔어요.

▶서형일(전기공학부 06)=장황하게 설명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교수는 100여 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잖아요. 삼각함수의 3배수 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 쉬운 문제는 포인트를 잡아 최대한 간결하게 얘기하고 남는 시간에는 어려워서 못 푼 문제를 교수님 도움으로 푸는 게 좋아요. 어려운 문제는 남들도 대부분 못 푸니까 그걸 계기로 사적인 대화를 하면서 자신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예요.

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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