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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마음이 아플 때 기댈 수 있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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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태종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김태종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다중골절된 다리를 문틀에 치인 적이 있었다. 우울증도 앓아 본 사람으로서 그 고통은 다중골절의 물리적 통증 이상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사업가이자 다년간 영국 상원의원으로도 봉직했던 데니스 스티븐슨의 증언이다. 권리 주장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한국의 정신질환 환자와 가족은 소리 없이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

2021년에 진행된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의 1.7%가 우울증, 3.1%가 불안장애라는 결과가 나왔다. 유럽에서 우울증의 유병률이 대략 8%, 불안장애는 8%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한국인의 정신건강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일까. 진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 우울증 유병률을 6.7%로 추정하는 연구 결과도 있는 데다 우울한 기분, 만성적 피로, 불면, 흥미 상실 등 우울증에 수반하는 증상의 수준이 서구 국가에 비해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정신질환이라는 ‘주홍글씨’의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설문 조사에서조차 솔직한 응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울·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
영국은 상담인력만 1만1000명
정신건강에 대한 투자 필수적

정신질환자를 위한 변론. [일러스트=김지윤]

정신질환자를 위한 변론. [일러스트=김지윤]

정부가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 539억원 규모의 예산안을 지난 1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여야 합의로 예산결산위원회에 전달했다. 우울과 불안 등 마음에 어려움이 있는 국민을 위한 심리상담 서비스 제공을 확대하고, 향후 5년간 관련 사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 체계 구축에도 투자할 것이라 한다.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계 심리학계는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임상 시험을 통해 효과성이 입증된 근거 기반 심리치료 기법을 축적해 왔다. 내담자를 붙잡아 두는 마음과 몸의 기제를 스스로 학습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지행동치료(CBT)가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인지행동 치료는 1주 1회의 세션을 단위로 진행된다. 일상이 힘들 정도의 우울과 불안이 있는 사례의 50% 이상이 10회 미만의 세션으로 정신건강을 되찾게 된다는 결과가 있다. 이런 인지행동 치료 결과에 놀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근거기반 심리치료의 혜택을 한 나라 전체에서 체계적으로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2010년 이후 영국의 경험을 통해 근거기반 심리치료가 전국 규모의 실제 사업에서도 그대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 실증됐다. 영국은 IAPT(Improving Access to Psychotherapy)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근거기반 심리치료를 시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전문 상담인력 1만1000명을 전국 센터에 배치했고, 고통받는 국민이 무료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재정으로 지원하고 있다.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도 세션마다 내담자의 개선 정도를 측정하고 지역센터 단위의 성과를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로그램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였다는 점도 눈여겨보게 된다.

보건복지부가 제안한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사업’은 내년부터 2028년까지 5년간 국민의 마음 건강을 지원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상정하고 있다.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국민이 나라에 기댈 수 있게 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소중한 예산은 의미 있게 쓰여야 하고 국민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효성 있게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정신건강 개선을 위한 투자는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생률, 실업으로 인한 노동력 손실, 취업자의 생산성 감소, 의료 및 복지 지출의 증가를 완화해 한국사회의 후생을 개선할 수 있다. 영국에 자극받아 후발로 근거기반 심리치료를 제도화한 노르웨이의 평가 결과에 따르면 B/C, 즉 비용 대비 편익의 비율이 1:3.6이나 된다.

누구도 정신건강 문제를 남의 일이라 치부할 수 없다. 유럽 국가의 경우 각종 정신질환을 함께 고려했을 때 평생 유병률이 평균 60%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한국의 평생 유병률은 어느 정도일까. 모처럼 시작되는 의미 있는 사업이 국회 심의를 순조롭게 통과해 좋은 열매를 맺기를 목소리 없이 고통받는 많은 이들과 함께 지켜보고 싶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태종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