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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백정의 아들이 선사한 서양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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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가면 한쪽 구석에 아늑한 역사관이 있다. 다들 모르고 그쪽을 찾지 않기 때문에 아주 조용하다. 병들어 고생하는 가족들을 힘겹게 돌보는 보호자들이 평화롭게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역사관 전시물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세브란스병원의 창립자라 할 수 있는 에비슨(Oliver Avison)의 생애와 업적이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겸 의사였던 에비슨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1893년 한국에 왔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도 맡게 되었다. 그 후 에비슨은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ouis Severance)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크게 재설립했다.

세브란스병원 창립 에비슨 박사
천민 집안 박서양을 의사로 키워
양반이 꺼리던 외과 수술서 명성
힘들고 험했던 의사의 과업 귀감

얼마 전 그 전시물에서 보고 놀라운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었는데, 에비슨이 아끼며 키웠던 제자 박서양의 이야기이다. 그의 아버지는 천민 중에도 가장 경멸당하는 백정이었는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던 중 우연한 인연으로 소개받은 에비슨 선생에게 치료받고 완쾌된 후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재능 있는 자기 아들에게 서양의학을 공부시켜보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1900년도에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면서 제1회 입학생으로 박서양을 받아주었다. 그 동기 중 7명만이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1908년에 서양식 의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는데, 그중에 천민 박서양이 당당히 끼었다.

박서양은 졸업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들을 길러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현지에서 학교를 세워서 한국계 동포들을 교육하고,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관으로 재직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만주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황해도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해방을 못 보고 50대 중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SBS 드라마 ‘제중원’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박서양이 의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일부 학생들이 그의 천민 신분을 문제 삼자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워라”라고 질책하며 독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통사회에서 천시받았던 사람이 외국에서 들어온 학문을 선구적으로 배워 자신을 아껴주지도 않던 사회에 너그러운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 조선에 서양의학을 도입한 것이 왜 중요했는가에 대해선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학도 사실 그 당시에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항생제도 없었고 엑스레이 찍는 기술조차 정립되기 전이었다. 의학의 과학적 기반이 되는 생리학, 생화학, 유전학도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학보다 현저히 우월한 점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전염병을 통제하는 방역에 대한 지식이었다. 일단 감염이 된 환자는 잘 치료하지 못 했지만 공중보건 정책을 써서 병이 퍼지는 것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19세기 서양의학이 고안해 낸 환자 격리, 접촉자 추적조사, 소독약 사용 등의 방법은 지금까지도 전염병 관리의 초석이다. 최근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다시 상기하게 된 점들이다. 1895년에 조선 땅에 콜레라가 돌았을 때 에비슨은 방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큰 공로를 세웠고 우리 정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영향력으로 그는 고종 황제에게 신분 차별을 완화하는 조치들을 권유했고, 그 덕분에 박서양 같은 천민들도 갓을 쓰고 양반들과 같이 당당히 예배를 보고 공공장소에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 서양의학에서 보여준 것은 수술이었다. 우리 전통 의술에는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법이 없었다. 명성황후가 1871년에 낳은 첫 왕자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서 며칠 만에 사망하였는데, 수술로 해결했으면 간단했을지 모른다.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라 칭해지는 박서양이 백정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피를 튀기며 사람의 몸을 자르고 도려내고 꿰매는 것은 백정이 할 일이지, 어떻게 양반이 손을 대었겠는가. 유럽 의학의 역사를 봐도 초기에는 내과 의사에 비해 외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았다. 그러나 서양 의학이 약진하기 시작했던 것은 훌륭한 이론 때문이 아니라 더럽고 끔찍하고 천한 해부와 수술을 감행하면서 인체의 신비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박서양은 백정의 피 대신 과학의 피를 보라 했지만, 백정의 피와 과학의 피는 따지고 보면 긴밀히 섞여 있다.

대학입시에서 의대가 최고 인기인 것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장래가 보장된다는 생각에서이리라. 그러나 진정한 의사의 과업이 절대 편하고 고상하지 않다는 것은 직접 해 보지 않더라도 잠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