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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최장기 칩거 들어간 김정은…지금 뭘하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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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지난 12일 오전 9시 방송의 첫 순서로 ‘한 평생 인민들 속에서’라는 55분 분량의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김일성 주석이 6·25전쟁 직후 현장을 찾아다니며 지도한, 즉 현지지도 영상을 편집한 내용이다. 최고지도자의 ‘헌신’과 주민들과의 교감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북한은 현지지도를 “가장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대중지도방법의 하나”로 정의(『조선말대사전』, 2017)한다. 최고지도자가 현지지도를 다녀온 곳에는 집중적인 자원 지원이 이뤄지고, 성과로 이어진다. 이는 김일성 주석(1994년 사망)-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에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3대(代)에 걸쳐 이어지는 분위기다.

10월20일 이후 매체서 안 보여
보름 이상 잠적 횟수 올해 최다
대내외 정세 복잡하다는 방증
장고 끝 도발 악수 두지 않기를

현장형에서 위임형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9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장관을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9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장관을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본지 통일문화연구소가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 첫해인 2012년부터 15일까지 지난 11년(4337일) 동안 그의 행적을 분석한 결과, 김 위원장의 공개활동 횟수는 모두 1413회다. 평균 3일에 한 번꼴이다. 그는 집권 첫해 151회 북한 매체에 등장했다. 2013년엔 212회로 연간 최다 활동 횟수를 기록한 이후 점차 숫자를 줄였고, 코로나19가 확산했던 2020년엔 54회까지 감소했다. 이후 90회 안팎으로 늘기는 했지만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는 집권 초기보다 절반가량 줄었다. 현장을 찾아다니며 현안을 파악하던 ‘현장형’에서 내각 총리 등에게 현장 챙기기를 맡기는 ‘위임형’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최근 모습을 감춘 김 위원장은 뭘 할까. 그는 지난달 20일(이하 북한 매체 보도일 기준)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을 면담한 이후 15일까지 26일 동안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라브로프 장관을 만나기 전엔 9월 28일 최고인민회의(14기 9차) 연설 이후 21일 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러시아 장관의 방북이 없었다면 김 위원장의 ‘칩거’ 기간은 48일로 늘어난다. 집권 이후 최장기간이다. 북한이 최근 주민들에게 올해 남은 시간 동안 연초에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라고 독려하는 상황에서 정작 컨트롤타워인 최고지도자는 모습을 감춘 것이다.

이쯤 되면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그의 건강 이상설이다. 김 위원장이 공개활동을 중단할 때마다 서방 언론에서 제기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건강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반복하는 연말 잠적

그렇다면 그가 ‘큰일’을 앞두고 두문불출했던 ‘과거’를 연상시킨다. 김 위원장은 남북, 북·중,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2018년 3차례 보름 이상 모습을 감췄다. 2021년과 지난해엔 각각 극초음속 미사일이나 저수지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도 공개활동을 멈췄다. 지난 5월 31일 군사정찰위성 1차 발사를 앞두고도 잠적했다. 현지지도를 통한 메시지 발신보다 정상회담이나 초관심사의 무기 발사 실험을 앞두고는 잠적해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는 패턴이다.

동시에 김 위원장은 2018년 이후 매년 10월이나 11월 어김없이 장기간 사라지는 ‘습관성 잠적’ 형태도 보인다. 연말 전원회의를 앞두고 결산이나 다음 해 전략 수립을 위한 장고(長考)의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북한은 2021년 당대회에서 5개년 계획을 제시했는데, 올해가 반환점인 만큼 뭔가 점검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일 수 있다.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중 대립 등 복잡한 국제 정세도 북한 입장에선 그만큼 민감한 상황이란 방증이다. 연초에 제시한 정책과 전략을 수정하기 어려운 유연성이 부족한 북한 입장에선 안갯속인 내년 미국 대선도 좌고우면해야 할 요소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궁금증 둘. 김 위원장의 칩거와 동시에 북한의 ‘맞짱 전략’이 주춤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한미 연합훈련에 즉각 군사적 행동으로 맞서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올해 대외 전력 기조를 ‘강대강, 정면승부’라고 제시하며 일종의 맞대응 전략을 공표했다. 이런 기조는 지난 9월 13일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기간 미사일을 쏠 때까지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한미 연합훈련이나 레이건함의 부산 방문, 이번 주 한미 군사위원회(MCM)와 연례안보협의회(SCM) 개최를 통한 대북 경고에도 조용하다.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이 칩거를 시작한 때와 겹친다. 이런 북한의 모습이 맞짱 전략의 수정인지, ‘큰 것 한 방’을 준비 중인지는 분명치 않다. 단, 15일 북한 매체가 지난 11일과 14일 각각 중거리탄도미사일용 신형 고체 연료 엔진 연소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신형 미사일이나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염두에 두고 압박에 나섰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이 결단의 시간을 끝내고 등장하는 시기에 군사 정찰 위성 발사 등의 긴장 고조를 재개할 우려가 제기되는 부분이다.

정부는 북한이 군사정찰 위성을 발사할 경우 9·19 남북군사합의의 효력 정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이 넘지 말아야 할 선, 일종의 레드라인인 셈이다. 한국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는 김 위원장도 이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9·19 합의는 김 위원장이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의 부산물, 즉 본인이 낳은 옥동자다. 이미 최장 잠적 기간을 보내는 그가 장고 끝에 악수(惡手),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