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장벽이 지켜준다는 허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지중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하이파. 동쪽으로 푸른 하늘에 맞닿은 시원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런데 눈을 낮춰 지상을 향하면 멀쩡한 시가지 한 필지에 새까맣게 타서 폭삭 주저앉은 건물의 잔해가 튀어나온다. 자폭 테러가 벌어졌던 자리다. 20년 전 기자 신분으로 찾았던 이스라엘의 하이파는 바닷바람 속에 느낄 듯 말 듯한 탄 냄새가 섞여 들어왔던,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한 공간에 겹쳐진 곳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는데 금속탐지기로 검사를 하고, 군인이 거리에서 소총을 메고 다닌다. 테러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때 이름 모를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달리던 중 갑자기 거대한 장벽과 마주쳤다. “(팔레스타인 지역) 어디에선가 차량으로 총알이 날아 들어와 아예 벽을 세워 막았다”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벽을 이스라엘 측은 보안장벽으로, 팔레스타인 측은 분리장벽으로 불렀다.

이스라엘, 1조 들여 ‘철벽’ 건설
위협 임박했는데도 나라 분열
지킬 태세 못 갖추면 장벽 무용

20년이 흐르면서 장벽은 더욱 꼼꼼하게 더욱 튼튼하게 더 많은 곳에서 건설됐다. 2021년 말엔 가자 지구를 둘러싸는 높이 6m, 길이 65㎞의 장벽이 완성됐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를 ‘철벽(Iron Wall)’으로 불렀다. 당시 이스라엘 매체 보도에 따르면 강철과 철근 14만t, 콘크리트 200만㎥가 장벽 건설에 들어갔다. 건설비가 1조2000억원에 달했다. 하마스는 땅굴을 파서 이스라엘로 침투한 뒤 주요 시설 지하에 폭탄을 설치해 피해를 주는 땅굴 공격도 구사한다. 땅굴 폭탄 공격은 중동에선 전형적인 공격 방식이다. 장벽은 그래서 땅굴 침투까지 막는 지하 차단용으로도 건설됐다. 카메라, 레이더, 센서와 원격조정무기가 땅 위아래의 장벽을 둘렀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장벽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방패는 언제나 창의 진화에 맞춰 후행했고, 구조적으로 불리했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독일군의 비상식적인 우회 공격으로 뚫렸고, 만리장성도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이 후금이 퍼뜨린 가짜뉴스에 목숨을 잃으며 뚫렸다.

이스라엘의 장벽도 지난달 뚫렸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이스라엘의 어느 한 단위에만 책임을 돌릴 게 아니었다.

① 네타냐후 총리는 반대파 설득과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시간이 걸리지만 필수적인 과정을 건너뛰어 사법개혁을 강행해 국론이 분열됐다. 하마스가 기습 공격을 몰래 준비하고 있던 지난 3월 이스라엘에선 사법개혁을 놓고 현직 총리와 현직 국방장관이 공개 충돌했다.

② 의회는 군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7월 24일 이스라엘군 장성 2명이 의회를 찾아 임박한 위협을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의원 2명 만이 브리핑을 들으러 왔을 뿐이다.(뉴욕타임스)

③ 군과 정보당국 역시 어디가 가장 위협이 될지 핀포인트로 집어낸 게 아니었다. 이란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에게 초점을 맞췄을 뿐 하마스엔 주의를 덜 기울였다.(뉴욕타임스)

④대외적으론 바이든 미 행정부와의 정보 공유, 동맹 외교도 소홀했다. 미국 측에선 “이스라엘이 공격 임박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이를 미국과 공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NBC 뉴스)

서울의 외교가에서도, 외신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만만하게 봤다”는 평가에서 일치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전례 없는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이를 사전에 감지해 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자국민이 인질로 끌려가 살해돼 두개골로 발견되는 참혹한 피해였다. 총리도, 의회도, 군도, 외교 당국도 교만했다. 스티브 잡스 식으로 비유한다면 이들 국가의 단위는 안보를 책임지는 점들이다. 점 하나가 무책임했다고 해서 ‘건국 이래 최대의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임의 점들이 한 줄로 연결되며 선이 만들어졌고, 그 선은 이스라엘이 믿었던 장벽을 뚫는 하마스 급습의 고속도로가 됐다.

이스라엘은 뒤늦게 하마스 없는 가자를 만들기 위한 지상전을 강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엔 기회의 창이 점점 닫히고 있다. 인질이 살해당하는 현실이 참담하나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로 피해가 확산하는 걸 국제사회는 옹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전쟁의 파장이 안방으로 밀려오는 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유가 급등으로 국내 민심이 요동칠 수 있는데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의 장기전을 반길 이유가 없다. 국제사회를 관통하는 유일한 법칙은 ‘현실은 냉정하다’는 데 있다. 임박한 위협 앞에서 이스라엘은 분열됐고 무관심했다. 장벽은 지키겠다는 태세와 의지를 갖춘 이들에게만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