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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하자" 누군 분노했다…뚝딱뚝딱 3년 ‘미륵사지 동탑'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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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배병선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단장

더 헤리티지

익산 미륵사는 1400년 전 백제 무왕이 조성한 사찰로 동아시아 최대규모였습니다. 터만 남은 자리에 두 개의 탑이 복원돼 있습니다. 그런데 동서로 위치한 두 탑이 좀 어색합니다. 동쪽은 9층으로 멀쩡(?)하게 섰는데, 서쪽은 짓다 만 듯 6층에서 멈췄거든요. 동탑은 3년 만에 뚝딱뚝딱 세웠고, 서탑은 돌 하나하나 복원하며 꿰맞춰 올리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배병선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은 서쪽(사진 왼쪽) 미륵사지 석탑을 20년간 수리할 동안 14년을 관여하며 최대한 원형 복원에 힘썼다. 1993년 완공된 동탑(오른쪽)은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쌓아올려 논란이 됐다. 장진영 기자

배병선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은 서쪽(사진 왼쪽) 미륵사지 석탑을 20년간 수리할 동안 14년을 관여하며 최대한 원형 복원에 힘썼다. 1993년 완공된 동탑(오른쪽)은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쌓아올려 논란이 됐다. 장진영 기자

서울에서 KTX를 타고 1시간 30여분 달려 도착하는 익산역. 다시 차로 10여분 더 가면 미륵사지가 나온다. 야트막한 전북의 산이 둘러싼 휑뎅그렁한 들판이다. 군데군데 옛 절터를 암시하는 장초석(높은 주춧돌)이 있고 입구에 당간지주가 서 있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건 뭐니뭐니해도 동서 양측의 두 탑이다.

한데, 둘의 동거가 어색하다. 1993년 복원된 9층짜리 동탑은 상륜부까지 ‘완전체’일지라도 하얗고 매끈한 게 기계로 찍어낸 느낌이다. 2018년 복원을 마친 서탑은 일부 탑신(몸돌)과 옥개석(지붕 모양의 부재)이 없어 반쪽짜리 모양새지만 세월을 탄 때깔이다. 두 탑 가운데 비록 반쪽이라도 1400년 자취를 간직한 서탑만이 ‘미륵사지 석탑’으로 불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상태의 동탑을 9층으로 설계하고 쌓는 데 3년이 걸렸다. 반면 한쪽 벽면에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바른 채 버티고 있던 서탑을 해체·수리해 지금 모양으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단일 문화재 수리로 최장 기록이다. 비용도 230억원이 들어 숭례문 복구(약 250억원) 다음으로 많다. 육안에도 확 다른 동탑과 서탑의 복원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27m 높이의 동탑을 보면 위압적이다. 하지만 1400년 전 형태를 본뜬 탑에 세월의 흔적은 전혀 없다. 동탑의 부재들은 마치 두부모 자른 듯 반듯반듯하다. 다이아몬드 칼을 이용해 큰 원석을 절단하고 표면을 재가공했다고 한다. 더욱이 동탑 1층 탑신 기둥과 옥개석 받침을 보니 가느다란 갈라짐이 보였다. 서탑 복원사업 20년 가운데 14년을 관여한 배병선(63)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은 “표면이 너무 일정하다 보니 완충재 없이 딱 붙어버리고 힘이 편중되면서 저런 균열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끈하게 재단할 때 이 같은 문제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를 감수하고라도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서두른 결과로 보인다.

이 모든 게 반면교사가 돼 서탑 수리는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신중을 기하게 된다. 새 단장을 마치고 2019년 일반에 공개된 석탑의 전체 높이는 14.5m, 전체 폭 12.5m. 사용된 부재는 1627개, 무게는 약 1830t이다. 서탑은 옛날 방식으로 일일이 수공으로 쪼고 다듬었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거칠거칠한 표면에서 고졸한 맛이 난다. 특히 훼손돼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구부재에 신석재를 보강해 재활용한 게 돋보인다. 이렇게 신·구 부재를 티타늄으로 접합한 후 표면을 원래 형태대로 가공하기 등 당시 실무진이 개발한 기술이 5개나 특허 출원됐다. 현재 이 기술들은 캄보디아 유적 앙코르와트 등을 복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 배 단장은 “그 전엔 문화재 복원 기술을 일본에서 전수받았는데, 이제 석조문화재만큼은 우리가 제일 앞선다”고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동탑은 왜 그리 서둘러 복원된 걸까. 동탑지 발굴에서 나온 부재 중 실제 활용된 건 5%도 안 된다. 석탑이 7층인지 9층인지 논쟁 중인 상황에서 9층으로 단정했고, 대부분 신부재를 써서 지금처럼 복원됐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당시 경주 일대 개발과 균형을 요구한 지역적 압력이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호남 민심을 얻기 위해 익산 일대 발굴 복원을 국책사업으로 밀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우리는 사뭇 다른 두 탑을 미륵사지에서 만나게 된다. 어느 게 옳다고 말하기엔 그간의 우여곡절과 시대 변화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동탑을 가리켜 “20세기 최악의 복원 사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우람한 실물이 있는 덕에 미륵사의 옛 규모와 백제의 역사를 상상하는 데 도움받을 수도 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동탑도 20세기에 ‘중건’된 탑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게 될까. 1400년을 지나온 석탑은 묵묵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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