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도 홀린 경복궁의 밤, 원조는 고종의 ‘건달불’

  • 카드 발행 일시2023.09.21

더 헤리티지: 알면 더 보인다…‘볼수록 보물’을 만나다

진귀한 문화재일수록 구구절절 얽힌 사연이 많습니다. 그 의미와 멋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포착해 세대를 잇는 유산(헤리티지)으로 재발견하고 가꿔가는 이들을 만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문화유산의 매력을 곱씹어 봅니다. 다시 보면 볼수록 보물입니다.

② 경복궁 건축 조명 디자인한 고기영 대표

밤의 궁궐을 거닐어 본 적이 있는가. 고요하고 아늑하다. 도심의 소음이 한풀 꺾인 내밀한 공간에선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마저 단속하게 된다. 달과 별, 소슬한 바람소리, 낮은 풀벌레 울음. 낮의 궁궐이 이국적인 풍경에 가깝다면 밤의 궁궐은 오래전 고향 같은 느낌이다. 매년 봄·가을 경복궁·창덕궁의 야간 기행 프로그램 예매를 둘러싼 ‘광클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처럼 낯선 여행의 운치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경복궁을 야간 개방한 건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기 위해서가 사실상 처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밤에도 잘 둘러볼 수 있도록 환하게 조명을 둘렀다. 이 같은 야경이 바뀐 게 2018년. 밝기가 한층 차분해지고 조명의 강약이 뚜렷해졌다. 그제야 버선코처럼 날렵하게 솟은 근정전 처마 끝이 선명해졌고 경회루 지붕 색색의 단청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문창호를 통해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마치 임금이 책장이라도 넘기고 있을 것만 같다. 경복궁 내 건청궁이 188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식 조명을 밝힌 역사적 장소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같은 ‘빛의 마술’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고기영 비츠로앤파트너스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고 대표는 2018년 경복궁 조명을 전반적으로 다시 설계하면서 주요 전각들의 밝기를 섬세하게 차등 배분했다. 조선시대 국가 주요 행사와 조회가 열리고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근정전이 단연 돋보이는 밝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고기영 비츠로앤파트너스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고 대표는 2018년 경복궁 조명을 전반적으로 다시 설계하면서 주요 전각들의 밝기를 섬세하게 차등 배분했다. 조선시대 국가 주요 행사와 조회가 열리고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근정전이 단연 돋보이는 밝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좋은 공간을 경험한다는 건 좋은 음악처럼 강약이 있고 고저가 있고 대비(contrast)가 있는 거죠. 자연광에선 빛이 시간성을 갖는데, 인공 광원에선 그럴 수 없잖아요. 대신에 공간에 음악 같은 운율을 주고 이를 통해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하는 거죠.

2018년 당시 경복궁 조명 설계를 맡았던 고기영(58) 비츠로앤파트너스 대표의 말이다. 한국의 1세대 건축조명 디자이너라 할 고기영 대표는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인 ‘서울스퀘어’ 리노베이션, 광안대교·부산항대교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강릉의 경관(景觀) 조명 등 굵직한 조명 프로젝트는 도맡아 해왔다. 앞서 ‘창덕궁 달빛 기행’ 조명 설계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경복궁까지 수주한 그는 “아픈 손가락처럼 아꼈고 아쉬움도 적지 않다”면서 “핵심은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 전통미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경복궁 조명을 돌아본다. 그가 전달하려 한 600년 법궁(法宮)의 이상은 무엇일까.

이성계의 첫 궁궐, 고종 중건 땐 7800여 칸 규모

서울 경복궁 근정전의 밤 풍경. 넓고 얇은 바닥돌(박석)이 가지런히 깔린 마당이 조정(朝廷)으로 가운뎃길 양쪽 남북 방향으로 각각 열두 개의 품계석이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경복궁 근정전의 밤 풍경. 넓고 얇은 바닥돌(박석)이 가지런히 깔린 마당이 조정(朝廷)으로 가운뎃길 양쪽 남북 방향으로 각각 열두 개의 품계석이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4세기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

유럽의 어느 건축조명 잡지가 경복궁 야행을 가리켜 표현한 구절이다. 틀린 말이기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경복궁이 19세기 궁궐 건축 양식을 따르며 21세기에 복원 중이고, 그 저변에 14세기로 올라가는 조선 정궁의 기틀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