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전, 누가 왜 파묻었나…인사동 금속활자 미스터리

  • 카드 발행 일시2023.10.05

더 헤리티지: 알면 더 보인다…‘볼수록 보물’을 만나다

진귀한 문화재일수록 구구절절 얽힌 사연이 많습니다. 그 의미와 멋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포착해 세대를 잇는 유산(헤리티지)으로 재발견하고 가꿔가는 이들을 만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문화유산의 매력을 곱씹어 봅니다. 다시 보면 볼수록 보물입니다.

③ 조선 금속활자 ‘미스터리’ 추적한 이재정 박사  

2021년 서울 인사동 한복판 공사장에서 뜻밖의 유물이 쏟아졌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금간 항아리에 담긴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각난 천문시계 부품, 조선시대 화포인 총통(銃筒), 동종(銅鐘) 등 금속제 파편들. 이와 함께 1600여 점에 달하는 금속활자가 나왔다. 유물 가운데 소승자총통의 제작연도가 1588년으로 확인되면서 이 유물들이 약 500년 전에 묻힌 것으로 판명났다. 다시 말해 금속활자들은 16세기 이전의 것. 심지어 이들 중 600여 점은 한글 활자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땅에서 출토된 것은 처음이고, 특히 한글 금속활자가 이렇게 무더기로 나온 것은 전무후무하다.

이 소식을 가장 반긴 사람 중에 활자 연구자 이재정(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박사가 있다. 그는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져온 750여 점의 한글 금속활자 안에서 처음으로 조선 전기 활자 30여 점을 가려냈다. 당시만 해도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 밤낮없이 새끼손톱만 한 활자 유물을 들여다본 끈기 덕분이었다. 인사동 출토 활자가 비교적 신속하게 조선 전기 것으로 확인된 것도 이 같은 선행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사동 활자 가운데 1434년 주조된 초주갑인자가 확인되면서 우리는 1377년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 인쇄본 『직지』(현재 프랑스에 소장) 외에 최고 실물활자까지 보유한 나라가 됐다. 뿌듯하고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 박사의 반응은 “글쎄올시다”다.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한문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2021년 서울 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조선 전기 한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사진 문화재청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한문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2021년 서울 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조선 전기 한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사진 문화재청

금속활자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최초·최고·최다 기록을 다 가졌다 볼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활자 유물을 보면 다른 걸 놓치게 됩니다. 예컨대 조선 왕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만 점의 금속활자를 주조하지만, 한글 활자에 대해선 별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전해지는 규모도 전체의 한줌 정도예요. 그 모든 활자가 왕실 중심으로 전해지는 것도 세계적으로 드물죠. 이게 당시 조선 사회와 지배층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인사동 땅 속에서 나온 금속활자 항아리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중국사를 전공하다 2000년 늦깎이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해 처음 배속된 곳이 유물관리부.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을 관리하는 업무 중에 처음 만난 금속활자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구릿빛 활자가 만질만질하게 빛날 때 얼마나 이쁜지 모른다”고 마치 자식 대하듯 말하는 연구자. 지난 6월말 23년간의 박물관 업무를 마치고 정년퇴임하면서 그간 연구를 책(『활자본색-우리가 몰랐던 조선 활자 이야기』)으로 펴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들러본 곳도 프랑스국립도서관 특별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이었다. 이곳에서 『직지』가 1973년 이후 50년 만에 처음 공개됐기 때문. “활자를 다룬 역사를 비교할수록 각 나라의 문화와 이념이 보인다”는 그가 ‘인사동 활자를 파묻은 사람’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내놨다. “이런 재미난 얘기, 누가 제발 소설·영화로 다뤘으면 한다”는 그의 20여 년 ‘활자 탐색’을 따라가 보자.

활자 연구자 이재정 박사(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얼굴에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찍은 금속활자 촬영분을 합성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활자 연구자 이재정 박사(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얼굴에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찍은 금속활자 촬영분을 합성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첨단 반도체급 기술력 필요했던 금속활자

82만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우리 옛 활자 유물 숫자다. 약 50만 점이 금속활자고 목활자가 약 30만 자다. 이것 외에도 서울대 규장각 등에 전해지는 활자 수량이 상당하다. 인사동 활자가 1600점 나와서 떠들썩했지만 규모만 보면 강에 물 한 바가지 얹은 격이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활자 유물이 이렇게나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