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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100만원, 두달뒤 4000만원 됐다…'사채 지옥' 칼빼든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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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옥의 시작은 위암 수술비 100만원을 빌리면서였다. 사업 실패 후 위암 판정까지 받은 조모(34)씨는 수술비가 없었다. 신용도가 떨어져 금융권 대출도 불가능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 ‘대출 플랫폼’에 글을 올렸더니, 한두시간 만에 수십 군데서 연락이 왔다. 조씨는 9일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일에 얼마 해준다’ 하니까 혹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불법 사금융 업체가 피해자들에게 뿌리겠다고 협박한 포스터. 피해자들이 제때 돈을 갚지 않으면 사진과 인적사항을 넣어 가족과 지인에게 배포한다. 서지원 기자

불법 사금융 업체가 피해자들에게 뿌리겠다고 협박한 포스터. 피해자들이 제때 돈을 갚지 않으면 사진과 인적사항을 넣어 가족과 지인에게 배포한다. 서지원 기자

빚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1주일 뒤 190만원을 갚으라 해 다른 업체 네 군데서 50만원씩 200만원을 빌렸다. 연 이자로 계산하면 4320%로 법정 최고 이자율(20%)을 훌쩍 넘었지만, 소액이니 금방 갚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빚은 두 달 만에 4000만원까지 늘었다. 조씨는 “돈 빌릴 때 신분증 들고 영상·사진 찍으라고 한 뒤,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연락처를 가져간다”면서 “안 갚으면 가족·지인에게 보내는데 초등생 조카 학교까지 찾아가겠다고 협박해 결국 누나가 갚아줬다”고 했다. 조씨는 업자들이 있는 단체방에 초대돼 수시로 돈을 갚으라며 욕설과 협박을 들어야 했다.

빚의 굴레 씌운 뒤, 나체 사진 협박까지

불법 사금융 업체는 이처럼 처음엔 50~100만원의 소액 대출로 심리적 장벽을 낮춘다. 하지만 상환이 조금만 늦으면 살인적 이자를 추가로 물려 빚의 굴레를 씌운다. 악랄한 추심과 함께다.

대출 플랫폼을 통해 200만원을 빌린 이모(23)씨도 2주 만에 780만원으로 빚이 늘었다. 2시간 늦게 돈을 상환했다는 이유로 조씨와 비슷한 방식의 추심을 당했다. 이씨는 “내 얼굴 들어간 수배 포스터를 만들어 내 친구들에게 뿌리고, 지인 70명에게 밤늦게 전화해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하게 했다”고 하소연했다. 최근 서울 동대문경찰서가 검거한 불법 사금융 일당은 채무자의 나체 사진을 유포하기까지 했다.

사법당국이 적발하면 운이 좋은 경우다. 금융감독원 등에 문을 두드린 피해자들은 상담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이자만 더 늘어났다고 했다. 특히 모든 대출 과정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다 보니 경찰의 수사도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사금융 업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접촉하고, 전화번호·실명을 감추기 때문에 피해자가 고소 대상을 특정 짓는 게 힘들어서다.

“최대 7만명 몰려”…신고 건수도 5년 만 최고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최근 금리가 오르면서 불법 사금융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서민금융연구원이 저신용자(6~10등급) 5478명과 우수 대부업체 23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지난해 대부업체에서도 돈을 못빌려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내몰린 저신용자는 3만9000명~7만1000명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 나온 추정 규모(3만7000명~5만6000명)와 비교해 최대 26.7%가 늘어난 수치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6800억원에서 1조2300억원에 달한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올 상반기 금감원에 접수된 불법 사금융 피해 상담·신고(6784건)도 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9월까지 검거된 불법 사금융 범죄 건수(1018건)도 1년 전보다 35% 증가했다. 한국갤럽 등이 불법 사금융 시장을 실태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7년 6조8000억원(이용자 52만명)이던 불법 사금융 시장 규모는 2021년 10조2000억원(76만명)까지 불어난 것으로 추산됐다.

尹 “약자 피 빠는 범죄, 강력 처단”

 9일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불법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간담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9일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불법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간담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처럼 불법 사금융 피해가 늘자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9일 윤석열 대통령은 금감원 불법 사금융 피해 신고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약자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자는 죄를 평생 후회하도록 강력하게 처단하고 필요하면, 법 개정과 양형기준 상향도 추진하라”면서 “국세청은 강력한 세무조사로 불법 사금융으로 얻은 이익을 단 1원도 은닉할 수 없도록 조치하길 바란다”고 했다. 앞서 ‘불법 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TF)’도 지난달 종료 예정이었던 특별 단속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법정 이자 제한이 불법 사금융 키워”

정부 노력에도 서민금융 공급이 늘지 않으면 불법 사금융의 싹을 도려낼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올해 안으로 서민금융 공급 확대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법정 최고 금리가 저신용자를 불법 사금융으로 내모는 역설을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한국대부금융협회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부업 이용자 수는 98만9000명으로 법정 최고금리가 인하된 2021년 6월 말(123만명)보다 24만1000명 줄었다. 안용섭 서민금융연구원장은 “최고 금리는 20%로 고정돼 있는데, 시장금리 올라 자금 조달비용 상승하다 보니 대부업체는 대출을 진작에 관뒀고, 제2금융권도 계속 대출 줄일 것”이라면서 “현재 국내 불법 사금융 시장 규모는 약 2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데, 더 늘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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