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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은 오늘도 '한 줄' 썼다…입담 밑천은 섬진강 길 500m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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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용택 ‘섬진강 시인’이 권하는 느리게 걸으며 자연과 대화하기

호모 트레커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오늘도 걷고 오늘도 한 줄 씁니다. 임실군 진메마을 개울 따라 징검다리 건너며 물소리, 마을 소리, 바람처럼 옮깁니다. 일흔 다섯이 된 시인은 이제 허리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차를 타고 나가 매일같이 제일 좋아하는 여울목 언저리 500m를 걷습니다. 평생을 진메에서 살았지만, 지리산 품고 섬진강 따라 그의 입담은 끊기지 않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지난달 25일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자택 인근 섬진강 산책로를 걷고 있다.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 중 왼쪽 나무는 수령 60년으로 시인이 직접 심었다. 김종호 기자

김용택 시인이 지난달 25일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자택 인근 섬진강 산책로를 걷고 있다.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 중 왼쪽 나무는 수령 60년으로 시인이 직접 심었다. 김종호 기자

“지금부터 좋을 때요. 여긴(섬진강 상류 진메마을) 늦가을 만추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에요.”

지난달 25일, 김용택(75) 시인이 집 앞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長山理, 진메) 앞 개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인의 등 뒤론 그가 직접 심은 6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거대한 풍선처럼 서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길을 걷는다. 다리를 건너 물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다시 내를 건너와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30분. 산책하고 사색하며 글감을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징검다리 사이를 지나는 물소리, 농부들이 일하면서 하는 얘기, 가끔 동네 할머니들이 하는 뜬금없지만 귀가 쫑긋해지는 그런 얘기들…. 돌아오면서 생각난 내용을 집에 가서 적곤 합니다. 올해부터 시작한 ‘하루 한 줄 쓰기’예요.”

그의 노트북을 펼쳤더니, 이렇게 적혀 있다. “자연은 아양떨지 않는다” “나는 배다. 정량을 배에 실어라” “시적인 거푸집을 깨뜨리고 나아간다” “손에 쥔 것들을 놓는다. 바람처럼 햇볕처럼 사랑처럼. 바람이 가지고 온 빗방울처럼. 없으면 시들어 죽는다.”

그리고 다시 오전 볕이 긴 산을 넘어 섬진강 바닥까지 닿을 무렵이면, 니콘 디지털카메라에 28-300㎜ 렌즈를 끼우고 강가로 나간다. 이번엔 진메와 아랫마을 천담(川潭)의 중간 지점까지 간다.

김용택 시인이 25일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시인문학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김용택 시인이 25일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시인문학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느리게 걸으니까 어때요? 별것이 다 보이지요? 천천히 걸어가면 안 보이는 들꽃들이 보이고, 안 보이던 새들도 보여요. 훅 지나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언제까지 가야 한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가다가 가기 싫으면 그냥 말면 되는 것이지.”

마침 강 건너편 쪽 기슭에 원앙과 청둥오리, 토종 오리, 논병아리가 노닐고 있었다. 자전거가 다니고, 사람 걷는 길이 이쪽 편이라 새들은 주로 저쪽 편 기슭에서 논다고 한다. 물까치와 붉은머리오목눈이(콩새), 박새, 개개비가 날고 있었다. 시인은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면서 새들에 관해 설명했다.

“내가 오리를 찍으러 나오면 저놈들이 나를 경계해. 나를 알아본다는 뜻이지. ‘김용택이가 또 나를 찍고 있네. 뭣하러 매일 나와서 나를 찍고 있지?’ 이런단 말이지. 또 개개비 저놈은, 작은 새는 경계심이 많아서 나무 꼭대기에 앉지 않는데 저놈은 유달리 저렇게 꼭대기를 좋아해. 언뜻 보면 작은 참새 같지만, 참새하고 아주 달라요.”

시인은 마치 새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말했다. 새에 대해 딱히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새 박사’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시인은 1948년 임실군 진메에서 태어나 섬진강을 떠난 적이 없다. 스물세 살 때인 1971년 모교 덕치초등학교 선생님이 됐다. 이후 천담·갈담·마암초교 등 인근 시골학교에서만 38년을 보냈다. 섬진강 연작의 첫 시인 ‘섬진강 1’은 1982년 가을에 발표했다. 시인은 그때 섬진강 상류와 지금의 외형은 비슷해도 속은 달랐다고 했다.

“당연히 그때는 지금보다 더 예뻤지요. 강둑이라는 게 없었고, 강물이 훨씬 더 굽이굽이 치며 흘렀어요. 그래서 다슬기, 은어가 천지였어요. 지금은 한 십여 년 전부터 하수종말처리장이 생겨 좋아지고 있기는 해요. 올여름부터 은어가 다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시인은 지난 3년 동안 모은 시를 모아 올봄 『모두가 첫날처럼』 시집을 냈다. 열네 번째 시집이다. 내년 봄께는 ‘하루 한 줄 쓰기’ 등 써놓은 에세이를 모아 산문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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