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시작, ‘겨울’로 끝났다…이틀간 54㎞, 태백의 500인

  • 카드 발행 일시2023.10.24

지난 21일 오전 4시30분, 강원도 태백시 황지연못 주변으로 30~40L 크기의 배낭을 멘 트레커 수십 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날 열린 ‘온더트레일(On The Trail, OTT)’ 장거리 하이킹 참가자들이다. 이틀 동안 걷고 하룻밤을 자는 데 필요한 모든 짐을 메고, 태백 인근 ‘백두대간(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큰 산줄기)’ 능선과 태백산 등 산길 54㎞를 걷는 하이킹&백패킹(Backpacking) 이벤트다.

지난 21일 강원도 태백시 백두대간 일원, 장거리 하이킹에 참여한 한 남성이 함백산을 향해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지난 21일 강원도 태백시 백두대간 일원, 장거리 하이킹에 참여한 한 남성이 함백산을 향해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특히 첫날 걷는 거리가 40㎞에 달해 그간 국내에서 열린 장거리 하이킹 코스로는 가장 길다. 황지연못에서 출발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매봉산(1303m)·금대봉(1418m)·함백산(1573m)·태백산(1567m)을 차례로 넘는데, 이 중 금대봉·함백산·태백산은 ‘100명산’에 꼽히는 산이다. 하루에 100명산에 드는 산을 3곳이나 올라야 하는 험난한 코스로 웬만해선 엄두도 못 낼 구간이지만, 500명이나 신청했다고 해서 어떤 이들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기자도 도전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출발 시각인 오전 5시, 먼저 등록을 마친 십여 명의 트레커를 필두로 태백 시내에서 매봉산으로 향하는 행렬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캄캄한 밤에 오직 모바일 앱에 의존해 길을 찾았다. 기자도 선두그룹의 뒤를 따랐다. 시내를 지나는 가운데, 어느 모텔 앞에서 한 남성이 기자를 보고 물었다. “벌써 시작했나요?” 간밤에 혼자 모텔에서 묵은 참가자였다. 평소엔 고요한 아침을 맞이했을 태백 시내는 이날 전국에서 모여든 트레커들로 북적였다.

산행 들머리는 백두대간 능선이 지나는 삼수령(935m) 바로 아래 작은피재다. 삼수령은 한강·낙동강·오십천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이곳에 떨어진 빗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에 이르고 남쪽으론 낙동강, 동쪽으론 동해에 닿는다.

작은피재에서 오르자마자 눈앞에 ‘바람의 언덕’ 능선이 펼쳐졌다. 이 고개를 넘어야 매봉산이다. 수십여 기의 풍력발전기와 고랭지 채소가 재배되는 ‘바람의 언덕’에 올라서니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급기야 매봉산 정상에 서니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이날 오전 태백의 최저 기온이 영하(-1도)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눈이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맞았다.

장거리 하이커 정연호 씨의 배낭. 장비와 식량, 물 등을 합해 약 10㎏이다. 김영주 기자

장거리 하이커 정연호 씨의 배낭. 장비와 식량, 물 등을 합해 약 10㎏이다. 김영주 기자

야영을 겸한 장거리 하이킹은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게 관건이다. 그래서 ‘경량(Light) 백패킹’으로도 불린다. 짐이 작을수록 어깨와 다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줄일 수 있고, 그래야 오래 걸을 수 있으므로 텐트부터 칫솔까지 경량 장비가 필수다. 일반적인 백패커가 15㎏의 배낭을 메고 걷는다면 장거리 하이킹을 위해선 7~10㎏으로 맞춰야 한다. 이보다 더 줄인 경우를 ‘울트라 라이트(Ultra Light)’ 백패킹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장거리 하이킹 코스인 미국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약 4300㎞)을 걷는 하이커도 보통 배낭 무게를 10㎏ 안팎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대부분의 참가자는 30L 크기의 배낭을 멨다. 백두대간이나 지리산 종주를 하는 백패커의 배낭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다. 그래도 필수 의류·장비는 모두 있어야 한다. 특히 이날처럼 갑자기 눈이 내리는 등 환경이 급변할 때를 대비해 보온 의류와 장갑은 필수다. 다들 배낭에서 옷과 장갑을 챙겨 겨울 산행 채비를 했다. 시작할 땐 ‘가을 단풍’ 산행이었지만, 한두 시간 만에 ‘겨울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린 서리)’ 산행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