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은 오늘도 ‘한 줄’ 썼다…입담 밑천은 섬진강 길 500m

  • 카드 발행 일시2023.10.31

“지금부터 좋을 때요. 여긴(섬진강 상류 진메마을) 늦가을 만추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에요. 근데 사람들이 가을 시작할 때쯤 오고 안 와요. 지금은 마을 앞으로 다리가 놓였지만, 전엔 징검다리 여든여덟 개가 있었어요. 그게 한 오백 년 동안 그대로 있었지요. 저 다리를 넘어가면 닥나무·감나무·밤나무 밭이 있었고, 그 위로 저렇게 벚나무·느티나무·팽나무·참나무 단풍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 서리 맞아 숨이 죽은 건 참나무, 한창 노오랗게 익은 건 팽나무, 붉은 잎은 느티나무, 다 떨어져 버리고 없는 건 산벚나무예요. 참 조화롭지요?”

지난 25일, 김용택(75) 시인이 그의 생가가 있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長山理, 진메) 앞 개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인의 등 뒤론 그가 직접 심은 6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거대한 풍선처럼 서 있었다. 아직 맨 아래 1~2층 나뭇가지에만 단풍이 들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길을 걷는다. 다리를 건너 물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다시 내를 건너와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30분. 아침 산책 시간이기도 하고, 사색하며 글감을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징검다리 사이를 지나는 물소리, 농부들이 일하면서 하는 얘기, 가끔 동네 할머니들이 하는 뜬금없지만 귀가 쫑긋해지는 그런 얘기들…. 길을 돌아오면서 생각난 내용을 집에 가서 적곤 합니다. 올해부터 시작한 ‘하루 한 줄 쓰기’예요.

하늘에서 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 마을. 작은 다리 앞으로 점점이 징검다리가 보인다. 김종호 기자

하늘에서 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 마을. 작은 다리 앞으로 점점이 징검다리가 보인다. 김종호 기자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 그의 노트북을 펼쳤더니, 이렇게 적혀 있다.

“자연은 아양 떨지 않는다.”
“나를 떠나라.”
“나는 배다. 정량을 배에 실어라.”
“시적인 거푸집을 깨뜨리고 나아간다.”
“누구에게 이 말을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를 오래 생각한다. 고민이 된다는 것은 잘 가다듬고 며칠 지켜본다는 뜻이다. 생각이 변한다.”
“손에 쥔 것들을 놓는다. 바람처럼 햇볕처럼 사랑처럼. 바람이 가지고 온 빗방울처럼. 없으면 시들어 죽는다.(마당을 지나는 바람)”

그는 이렇게 매일 걷고, 걷고 나서 적는다. 이른 산책을 마치곤 아주 간단한 아침을 한다. 끓인 누룽지와 마른 멸치, 고추장이 전부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과 대화  

억새 길을 걷고 있는 김용택 시인. 아침식사를 한 후 새와 오리를 찍으러 다시 길을 나선다. 김종호 기자

억새 길을 걷고 있는 김용택 시인. 아침식사를 한 후 새와 오리를 찍으러 다시 길을 나선다. 김종호 기자

그리고 다시 오전 볕이 긴 산을 넘어 섬진강 바닥까지 닿을 무렵이면, 니콘 디지털카메라에 28-300㎜ 렌즈를 끼우고 강가로 나간다. 이번엔 진메와 아랫마을 천담(川潭)의 중간 지점까지 간다. 집에서 약 1.5㎞, 걸어서 30~40분 거리지만 요즘엔 차를 타고 이동한다. 허리 협착증으로 오래 걸을 수 없어서다. 종종 가는 한의사는 “걸어야 나아진다”고 하고, 정기 검진을 하는 병원 의사는 “걷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다는데, 어찌할지 몰라 집 가까운데는 걷고 집에서 먼 곳은 차를 타고 가서 걷는 방법을 택했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징검다리(천담리)가 나오는 여울목까지 약 500m를 왔다 갔다 한다. 이 구간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섬진강 길이다.

“느리게 걸으니까 어때요? 별것이 다 보이지요? 천천히 걸어가면 안 보이는 들꽃들이 보이고, 안 보이던 새들도 보여요. 훅 지나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언제까지 가야 한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가다가 가기 싫으면 그냥 말면 되는 것이지.”

마침 강 건너편 쪽 기슭에 원앙과 청둥오리, 토종 오리, 논병아리가 노닐고 있었다. 자전거 다니고, 사람 걷는 길이 이쪽 편이라 새들은 주로 저쪽 편 기슭에서 논다고 한다. 또 이쪽 자전거길 쪽엔 물까치와 붉은머리오목눈이(콩새), 박새, 개개비가 날고 있었다. 시인은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면서 새들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때마침 개개비가 “깨개개개개액” 숨 가쁘게 울었다.

“내가 오리를 찍으러 나오면 저놈들이 나를 경계해, 나를 알아본다는 뜻이지. ‘김용택이가 또 나를 찍고 있네. 뭣 하러 매일 나와서 나를 찍고 있지?’ 이런단 말이지. 또 개개비 저놈은, 작은 새는 경계심이 많아서 나무 꼭대기에 앉지 않는데 저놈은 유달리 저렇게 꼭대기를 좋아해. 나한테 사진 찍히려고. 콩새는 수풀 사이를 헤쳐 다녀서 보기 힘든데, 오늘은 저렇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습을 보여주네요. 언뜻 보면 작은 참새 같지만, 참새하고 아주 달라요. 작은 새가 저렇게 순식간에 움직이는 게 너무 예쁘지요? 새들은 계절에 따라 용도에 따라 우는 것도 달라요. 봄에 짝짓기할 때가 가장 애절해. 저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