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싫다, 옛길로 걷자…설악~다대포 800㎞ 잇는 그들

  • 카드 발행 일시2023.11.07

지난달 31일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마을회관 앞, 등산 스틱과 나무 지팡이를 든 여덟 명의 트레커가 백운산(892m) 자락을 등지고 ‘스틱 체조’를 하고 있었다. 차림새와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 강원도 설악산에서 시작해 부산시 다대포까지 ‘중부내륙종단트레일 800㎞’ 길을 만드는 사람들. 사단법인 다움숲의 민병순(53) 대표와 박승기(67) 개척단장, 그리고 남녀 참가자 6명으로 꾸려졌다.

트레일 개척은 지난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이번 개척단은 4기 멤버로, 참가자는 모두 60대였다. 길을 만드는 작업은 산림청 후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는데, 그래서 참가 자격을 은퇴자 또는 명퇴자로 한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회적 걷기’ 모임이 됐다.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길을 내는 사람들. 지난달 31일 울산 내와마을 숲길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길을 내는 사람들. 지난달 31일 울산 내와마을 숲길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설악에서 다대포까지 트레일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오솔길과 산허리를 가르는 임도(林道), 그리고 강과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난 수변을 잇는다. ‘길이 아닌 곳’을 뚫거나 새로 내는 것이 아닌, 옛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잇는 작업이다. GPS를 통해 선을 그은 후, 한차례 답사를 거쳐 직접 걸어보고, 보통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 걷기에 적합한지 검증하는 수순이다. 일부 구간은 앞서 각 지자체가 조성한 둘레길과 겹치기도 한다.

“백두대간(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큰 산줄기)을 걷고 싶은 이들은 많지만, 길이 험해서 실제로 걷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또 학생들이 도전하는 국토종단 길은 다 아스팔트라 다리에 부담을 줍니다. 우리 산하에 걷기 좋은 옛길이 많은데, 그걸 두고 힘들고 어려운 산길·아스팔트길을 가는 게 안타까워 쉬운 국토종단 길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트레일을 설계한 박승기 단장이 말했다.

20년 전부터 트레일 개척 

박승기 단장은 한국 산악계에서 기인(畸人)이자 만물박사로 통한다. 1980년대엔 산에 미친 산악인이었다. ‘77에베레스트원정’과 맞먹는 규모였던 86년 ‘K2(8611m) 원정대’의 멤버로 수송을 담당했다. 당시 10t 가까운 짐을 화물선에 실어 파키스탄 카라치까지 운반했으며, 이를 5300m K2 베이스캠프까지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보통 꼼꼼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80년엔 76일간 부산 금정산에서 태백산맥까지 일시 종주하기도 했다. 백두대간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훨씬 전이다. 또 코오롱등산학교 창립 멤버로 20여 년간 독도법을 강의했으며,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잴 수 있는 특수한 자를 만들어 ‘승기 자’로 이름 붙이고 특허 출원했다. 또 지금 북한산 둘레길의 모태가 된 ‘북한산 라운드 트레일’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승기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개척단장. 김영주 기자

박승기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개척단장. 김영주 기자

무엇보다 그는 20년 전부터 일반인에게 생소한 트레일(Trail)을 소개하며, “산행의 개념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해야 한다([사람 사람] 국내 트레일 코스 개발하는 박승기씨, 본지 2004년 5월 5일 자)”고 설파했다. 당시 “향후 산행은 산촌을 따라 산길을 지나고 계곡을 지나며 자연을 감상하는 트레일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20년 전에 ‘둘레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예상한 셈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산악계는 엄홍길·박영석(2011년 작고) 대장이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 레이스를 펼치던 때다. 그때 “산행은 수직이 아닌 수평 위주가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날 걷기 길은 임도가 주를 이뤘다. 내와마을에서 동쪽으로 백운산과 용암산(558m), 서쪽으로 자리 잡은 천마산(613m)과 아미산(603m) 사이로 난 야트막한 산길이다. 길은 구화사 인근까지는 천주교 둘레길, 영남알프스 둘레길 3코스와 겹쳤다. 그리고 구화사를 지나 아름다운 임도 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길은 시멘트 포장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났는데, 늦가을 때마침 떨어진 참나무 단풍이 길을 덮고 있었다. 발끝에 낙엽이 치이는 “쓱쓱” 소리에 맞게 경쾌한 걸음이 계속 됐다. 이들 일행은 걷는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산행 앱에 찍히는 평균 속도는 시간당 3㎞로 오르막을 오를 때도 땀이 나지 않는 보폭이었다. 길을 걸으며 확인하고 기록해야 했으므로 빨리 걸을 수 없었고, 하루에 가야 할 길이 약 15㎞였기 때문에 속도를 낼 필요도 없었다.

산행 중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박승기 단장은 트레일 개척단을 구성할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걸으면서 하지 말아야 금기(禁忌), ‘행진 십계명’을 정한 것이다. ‘돈·아파트 자랑하지 말고 걷기에만 열중하자’는 수행 지침이다. 전국 각지의 트레커가 만나 여러 날 함께 걷게 되면 혹시 모를 분란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사전에 차단하자는 취지다. 그가 직접 십계명을 작성해 걷기 전에 모든 참가자에게 서약서를 받았다고 한다.

“산에 와서 꼰대 취급받으면 안 되니까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하지 말자는 거죠.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듣고 싶지 않은 소리 하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꼭 있잖아요. 정치 얘기, 골프 얘기, 주식·아파트·학벌 자랑, 대기업에 취직해서 잘 나간 얘기, 남편·부인·자식 가족 자랑, 산에서 만난 로맨스, 종교 얘기…. 이런 얘기 하면 경고를 주고, 세 번 경고 맞으면 바로 집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아직 그런 경우는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