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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밀착마크’ 시즌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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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기환 경제부 기자

김기환 경제부 기자

정부 부처 직제표에 없는 신설 보직이 등장했다. 가칭 농림축산식품부 ‘라면 과장’, 해양수산부 ‘고등어 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휘발유 과장’ 식이다. 품목별 물가상승률을 관리하는 게 주요 임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지난 2일 주재한 물가관계장관회의에서 “범부처 특별 물가 안정체계를 즉시 가동하겠다. 각 부처 차관이 물가 안정 책임관이 될 것”이라고 말한 직후다.

전담 공무원이 밀착 마크할 정도로 물가 상황판에 불이 붙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10월 물가는 1년 전보다 3.8% 올랐다. 지난 3월(4.2%)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높다. 올해 10월까지 누적 물가 상승률은 3.7%. 기획재정부가 내건 올해 물가 목표치(3.3%) 달성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물가만큼 민감한 소재도 없다.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이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수산물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이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수산물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물가관리 책임 실명제’를 도입했다. 52개 생활필수품을 지정해 개별 공무원에게 물가 상승의 책임을 물었다. 현 정부와 비슷한 방식이다. 때려서 잡히면 다행이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당장은 물가가 내렸을지 몰라도 나중에 한꺼번에 튀어 오르는 부작용이 생겼다.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를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물가를 억누른 결과다. 경제기획원(옛 기재부) 물가정책국장을 거쳐 재무부 장관(1982~1983년), 경제부총리(1997년)를 지낸 강경식 전 부총리의 회고다.

“과잣값을 잡으려고 했더니 양을 줄이고, 소줏값을 잡으려고 했더니 알코올 도수를 내리더라. 물가가 3%대로 안정됐다는 통계는 정확히 말해 ‘물가지수’가 3%대인 것이다. 정부 물가 잡기는 딱 거기까지가 한계다.”

강 전 부총리의 우려가 현실이 될 조짐이 보인다. 식품업계가 최근 가격은 그대로 둔 채 중량을 기존 5g에서 4.5g으로 줄인 조미 김, 과즙 함량을 100%→80%로 낮춘 오렌지 주스, 개수를 기존보다 2개 뺀 냉동 만두를 출시했다. 줄어든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에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더한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이다.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자 저항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고물가 원인은 복합적이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 세계에 뿌린 현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원자잿값 폭등, 미·중 패권경쟁이 부른 공급망 붕괴…. ‘뉴노멀(새 기준)’이 된 고물가 시대에 연착륙해야 한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1980년대 경제기획원 시절 잇따라 물가총괄과 사무관으로 일한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나 추경호 부총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물가는 잡는 게 아니라, 잘 하다 보면 잡히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