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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도 위로한 국민이모…"한 장의 러브레터로 기억되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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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호 16면

팔순 앞두고 새 시집 낸 이해인 수녀

부산 금련산 자락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이해인 수녀가 활짝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시집은 최근 출간한 『이해인의 햇빛일기』. 송봉근 기자

부산 금련산 자락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이해인 수녀가 활짝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시집은 최근 출간한 『이해인의 햇빛일기』. 송봉근 기자

초여름에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가을에 새 책이 나오니 그때 만납시다’는 답을 받았다.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이해인(79) 수녀는 부산 광안리에 있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60년째 살고 있다. 수녀원 오른쪽에 있는 ‘해인글방’을 둘러봤다. 이해인 수녀의 작품집과 책들, 시 구절이 적힌 액자, 전국에서 보내온 편지와 선물들이 아담한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매일 손님을 맞고, 차를 대접하고, 얘기를 나누고, 작은 선물을 준다.

해인글방 앞 벤치에서 다리를 절룩이며 내려오는 시인을 맞았다. 과연, 처음 뵙는데도 10년을 만난 사람처럼 살갑다. “아유, 꽃밭에 나비들이 춤을 추네. 멀리서 귀한 손님 왔다고 마중 나왔나 봐.”

2008년 찾아온 대장암을 이겨낸 그는 5년 전에는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는 대수술을 했다. 이번에 나온 시집은 『이해인의 햇빛 일기』(열림원)다. 아프고 힘든 일을 공감하고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위로자가 되면 좋겠다는 기도와 소망을 담았다고 한다.

가족·이웃에 받은 사랑 늘 기억해야

1976년 종신서원을 할 당시의 이해인 수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초판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이해인 수녀]

1976년 종신서원을 할 당시의 이해인 수녀.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초판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이해인 수녀]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요. 수녀님 건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15년 전 암 수술 이후 겉보기와 달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을 만큼 합병증 같은 게 있죠. 혈압·당뇨·통풍에 대상포진까지 오더라고요. 최근에는 코로나까지 걸려서 코로나 환자의 입장을 경험해 봤어요. 경험이라는 게 참 중요하죠. 암에 걸리고 나니까 암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몸으로 느끼고 방사선·항암이 어떤 건지도 경험을 해 봤죠. 얼마 전 암 재활협회 모임에서 너무 몸이 힘들었을 때 느낌, 어떤 마음으로 참았는지 얘기했더니 ‘나도 수녀님처럼 명랑 씩씩하게 투약 하겠다’ ‘밝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반응이 나와요. 아픔이 때로는 선물이 될 수 있구나 체감했죠.”
지금 다시 나를 기다리는 거지?/고맙게 먹어줄게/부디 내 몸 안의 길을/잘 찾아가서/부작용이 없기를 부탁할게(‘약이 내게 와서’)라고 약에게 인사했어요. 꽃·새·나비·나무는 물론이고 약과도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은 어디서 나오나요.
“어떤 것도 무심히 보지 않는 관심이라고 생각해요. (빨갛게 물들어가는 아왜나무 잎을 떼어내며) 나뭇잎도 어떻게 이렇게 물이 들었을까 생각하면 세상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되죠. 언어에 대한 감성은 천부적으로 받은 것 같지만 훈련이 필요해요. 저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일과를 간단히 메모하고, 그걸 갖고 일기를 써요. 늘 깨어 있는 노력을 하는 거죠. 어제는 우리 방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바퀴벌레가 나오는 거예요. 물통을 엎어 가둬놨는데 영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바퀴벌레에 대해 공부를 했죠. 벌레 하나라도 그 속성을 알면 달리 보이게 될 테니까요.”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천사도 오지 않는다’고 쓴 액자를 해인글방에서 봤어요. 그래도 매일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게 힘들지 않나요?
“힘들 때도 많지만 수도생활 반세기 이상을 하고 나니 세상 누구든 처음 봐도 낯설지 않고 일가친척으로 여겨지는 사랑의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다양한 모습을 한 예수님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맞다 보니 방명록이 37권째가 됐어요. 어제도 어떤 엄마가 점심때 예약도 없이 찾아왔는데, 몸이 너무 힘들어 순간적으로 갈등을 느꼈지만 만났죠. ‘새벽에 경기도 포천에서 차를 몰고 왔어요. 중학교 때 『내 혼에 불을 놓아』 포함해 수녀님 시집 네 권을 샀는데, 남편이 속 썩이고 힘들게 할 때마다 그 책으로 약을 삼았어요. 수녀님 만나서 너무나 기쁘고 앞으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면서 함박웃음을 머금고 올라갔어요.”
탈옥수 신창원이 2004년 12월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이모님’으로 시작한다. [중앙포토]

탈옥수 신창원이 2004년 12월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이모님’으로 시작한다. [중앙포토]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이 세상에서 저는/저의 잘못을 자주 기억하되/남의 잘못은 자주 잊어버려 행복한/순례자로 오늘을 살게 해주시길/부탁드리옵니다(‘고백’)고 노래하셨습니다. 살면서 기억해야 할 것, 잊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기억해야 할 것은 가족·친지·이웃으로부터 배려 받고 사랑 받은 것이고, 잊어야 할 것은 꽁하게 새겨둔 옹졸한 이기심이나 욕심, 용서 못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저는 ‘내 장례식에 사람이 너무 많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했어요. 법정 스님도 ‘다비식 끝나고 사리가 몇 개 나올까 고민한다’고 했어요. 미리 하는 쓸데없는 걱정 잊어버리고 하루하루 유머러스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엄숙하게 경직되게 살아온 게 좀 억울하기도 해요. 하하.”
파! 라는 단어가 주는 싱싱함/김치! 라는 단어가 주는 다정함/파밭이 많은 수녀원에서/파처럼 파랗게/살아야겠다(‘파김치를 먹으며’)고 하신 수녀님이 좋아하는 음식은?
“파가 아주 조금만 들어간 파전과 김치를 많이 썰어 넣고 참기름도 넣은 비빔국수입니다. 담백한 멸치국수도 좋아요. 아프고 나서 부쩍 더 국수종류를 좋아하게 되었지요. 말간 콩나물국과 감자전·메밀전·호박전·배추전 같은 것도 좋아합니다.”
‘사람들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외우는 일/외우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꽃과 나무와 새들의 이름을 공부하며/잘 기억해두려는 기쁨의 노력’이 나의 취미라고 쓰셨어요. 또 빈 병, 빈 상자, 빈 주머니에 무언가를 채워 선물하는 일도 작은 즐거움이라고 하셨죠. 이것이 천사놀이인가요?
“어떤 면에서 그러합니다. 제가 창의적으로 만들어 건네는 작은 선물을 받으면 다들 기뻐하니까요. 상대방의 직업·취미·성격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이왕이면 그에게 맞는 시나 성경구절을 써 주고, 그가 좋아할 만한 아이템이 눈에 띄면 모았다가 주기도 하는데 받는 이는 늘 감동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아왜나무 잎사귀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이해인 수녀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아왜나무 잎사귀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송봉근 기자

치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꼭 치매가 아니더라도 노년이 주는 건망증과 인지장애로 저도 가끔 우울한 적이 있는데, 꽃이 곱게 피었다가 시들듯이 사람의 일생도 싱싱하게 피었다가 때가 되면 시드는 거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아요. 친한 수녀님이 치매에 걸린 뒤 아끼는 물건에 1번부터 50번까지 번호를 붙인 뒤에 ‘내가 죽고 나면 1번은 누구 주고, 20번은 어디에 보내고’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하더라고요. 하느님께서 ‘이제 그만 놀고 들어오너라’ 하시면 가야 하니까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죠.”
더 이상/가게에서 사지 않아도 될/가장 아름다운 카드 한 장으로/(…)/한 장의 러브레터로 살다 갔다고/누군가 그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고!(‘꿈 일기- 카드를 사며’) 쓰신 시를 읽었어요.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 라고 하셨죠.
“저도 한 통의 편지가 되고 싶단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흰구름 천사도 되고 싶어요. 제 수도명이 Claudia인데 구름(cloud)과 비슷해서 좋아합니다.”

슬픈 사람들에겐/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눈으로 전하고/가끔은 손잡아주고/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그가 잠시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대책 없이 울면 같이 울어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위로에도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걸/우리 함께 배워가기로 해요
(‘슬픈 사람들에겐’ 중에서)

하늘·땅 잇는 흰구름 천사 되고 싶어

1994년 5월 수도원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과 함께 춤을 추는 이해인 수녀. [중앙포토]

1994년 5월 수도원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과 함께 춤을 추는 이해인 수녀. [중앙포토]

위로한다면서 상처를 덧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업(口業)을 짓지 않아야 할 텐데요.
“다른 이의 상황을 함부로 속단하지 않는 ‘판단보류의 영성’이 필요해요. 아프고 슬픈 이에겐 연민의 정을 갖는 따뜻한 마음과 말을 가려서 하는 조심성과 겸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중심으로 얘기를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줘야죠. ‘좀 어떠세요?’라는 한 마디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느낄 수 있답니다.”
생전의 법정 스님과 종교를 초월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셨는데요. 종교간 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지극히 인간적인 지점에서 우정을 나누면서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종교나 인생을 이야기할 적엔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의 덕이 필요하고요.”
‘국민이모’라는 별명을 좋아하세요?
“국민수녀·국민시인이란 말은 부담스럽지만 이모는 왠지 정겹고, 그래서 엄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이모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탈옥수 신창원씨도 편지에 ‘해인 이모님’이라고 쓰거든요. 이모가 되려면 마음이 넓어야 되니까 화도 덜 내고 뭐라도 나눠주면서 살고 싶은 거죠. 만나는 사람한테 선물 주니까 요술공주 이모님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호호.”

헤어질 시간이다. 책 두 권, 성경말씀 적은 쪽지, 주전부리 과자까지, 과연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잠깐 기도를 바쳤다. ‘해인 이모님이 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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