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대통령이 스스로 언급한 단어 ‘탄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9월, 23년간 맥줏집을 운영해오던 서울 마포구의 한 상인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굳게 닫힌 가게 문에 나붙었던 추모 포스트잇 중에 ‘곧 따라갈 거에요’라는 글귀가 있었다. 한계 상황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전국에서 발생하던 시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소상공인과 택시기사, 무주택자, 청년 등이 참가한 가운데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가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소상공인과 택시기사, 무주택자, 청년 등이 참가한 가운데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가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마포구의 한 북카페에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면서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맥줏집과 고깃집 등이 들어찬 마포 일대를 “학창시절부터 친구들과 뻔질나게 다녔다”는 윤 대통령은 정치에 뛰어들며 밝힌 입장문의 첫 페이지가 마포 자영업자 얘기였다고 소개했다. 대선 승리 후 맨 먼저 영업규제로 손실을 본 자영업자들을 위해 50조원을 집행하는 일부터 했다고 설명했다.

 회사원과 주부, 소상공인 등 60여 명을 초대해 의견을 들은 간담회에서 윤 대통령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국민의 안전을 살펴야 되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달래줘야 정부”라고 말했다. “미래를 위해 전략적인 투자나 외교 활동도 하고 공정한 시장과 교육 환경을 만들어 민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국민이 못 살겠다고 절규하면 듣고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더하고 뺄 것 없이 적절한 인식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언급에서 윤 대통령은 스스로 ‘탄핵’이라는 단어를 거론했다. “불요불급한 것을 좀 줄이고 정말 어려운 서민들의 절규하는 분야에 재배치시켜야 하는데, 받아오던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며 “받아오다가 못 받는 쪽은 그야말로 대통령 퇴진 운동을 한다”고 표현했다. “어려운 서민들을 지원하는 쪽으로 예산을 재배치시키면 아우성이다. 내년 선거 때 보자, 아주 탄핵시킨다 이런 얘기까지 막 나온다”고 목청을 높였다.

 윤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 이어 간담회에서도 “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서민들이 죽는다”며 긴축 재정 기조를 밝혔다. 그러니 재정 지출을 늘리지 않으면서 약자 보호를 두껍게 하려면 다른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과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탄핵을 언급한 것은 부적절하다. 예산안 관련 감축 시비가 이는 항목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표적이다. 과학자들 사이에선 외환위기 때도 R&D 예산이 안정적으로 유지됐고, 핵심 연구기관의 예산까지 삭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어제 기자회견에서 재정 지출 확대를 요구하면서 R&D 예산 삭감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예산을 놓고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집단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년 R&D 예산 축소 놓고 논란
“대통령 탄핵해야“ 움직임 없어
반대파와도 진솔하게 대화해야

 윤 대통령 퇴진을 공개 주장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대 노총이 오는 11일 3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연다. 서울 도심에서 20만 명이 모이겠다는 민주노총은 “정권 퇴진을 외칠 것”이라고 예고했다.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 같은 단체가 가세한다. 한국노총 조합원 10만 명은 여의도에서 정권 심판을 내걸고 모인다고 한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 일부 야권 인사들이 집회에서 탄핵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야당에서 탄핵을 의제화하고 있지 않다.

 그만큼 대통령 탄핵은 쉽게 꺼낼 수 없고, 꺼내서도 안 되는 단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안이 인용돼 대통령직에서 파면됐었다. 우리 헌정사에 그런 갈등과 아픔이 반복돼선 안 된다. 정부 예산에서 어떤 항목을 늘리고 줄일지는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해 조정하면 될 일이다. 정부와 야당이 생각이 다르다면 각자의 취지를 국민에게 설명해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대통령이 이런 사안에 ‘탄핵’을 말하면 자칫 예산 조정에 반대하는 측은 모두 정부 퇴진을 노리는 세력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탄핵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만 가능하다. 탄핵안 의결도 국회 재적의원 과반의 발의와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쉽게 가능하지 않은 사안을 대통령이 거론하면 총선에서 반대쪽을 표로 심판해 달라는 ‘정치적 수사’로 읽힐 소지가 있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누구의 탓을 돌리지 않겠다. 모든 것은 제 책임”이라고 말했다. “(탄핵을) 하려면 하십시오”라는 전투적인 표현 대신 예산 감축 대상이 된 이들과 만나 진솔하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