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지도」 만든다/노대통령 소 첫나들이 의미와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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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강체제 재편… 외교전 거셀듯/「성급한 접근」 없게 득실 따져야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공식방문은 우리나라 국가원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땅을 밟는다는 의미 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배해왔던 냉전체제가 아시아지역에서도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의가 있다.
지난 6월4일 샌프란시스코정상회담이 아시아에서 냉전의 얼음을 깨뜨리는 시작이었다면 이번 노 대통령의 방소는 깨진 얼음을 녹이는 작업에 비유될 수 있다.
14일 양국 정상이 공동서명할 「모스크바선언」은 이런 의미에서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결의 최후 분단지역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는 역사적 문건으로 기록될 법하다.
모스크바선언은 한반도에서의 냉전적 대결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의지를 밝힐 것이다.
이 선언은 동북아지역에서의 4강체제 재편을 염두에 둔 구체적 지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중국의 대한 태도변화와 북한의 적극적인 대일 및 대미 접근노력을 예상한 청사진을 펼칠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은 소련보다 한발 앞서 개방과 개혁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반도문제에서만큼은 소련보다 항상 한발짝 정도 뒤따라오는 정책을 취해왔다. 모스크바선언은 이같은 중국의 입장에 융통성을 부여,한·중국 국교수립을 앞당기는 촉매역할 겨냥하고 있다.
모스크바선언은 또 북한이 새로운 국제적 조류에 낙오되지 않게끔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적극외교를 펼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본 역시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 소련이나 중국에 이니셔티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북한카드를 이용한 적극적인 외교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한반도 주변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하면 평화정착구도로 바꾸고 궁극적으로는 남북대화 및 관계진전에 연결시킬 수 있느냐가 이번 노 대통령 방소의 가장 큰 목표다.
노 대통령이 13일 출국성명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변화되는 결정적 시기를 맞고 있으며 이번 소련방문은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의 날을 앞당기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대변한다.
노 대통령이 방소에서 얻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양국 실질관계 발전의 계기를 만드는 문제다.
양국 정상간의 무역·투자보장·2중과세방지·과학기술협력협정 등 4개 협정 체결이 말해주듯 지난 9월30일 수교로 시작된 양국 관계진전은 대통령의 방소로 가속될 것이 틀림없다.
이번 방소기간중 양국은 20억∼50억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문제 및 교역증진방안을 깊이있게 협의하고 타결지을 계획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소련 진출에 일본이나 미국보다 먼저 손을 쓰는 선착의 묘를 노리고 있으며 국가이익을 앞세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남보다 한발짝 앞서간다는 것이 그 만큼 유리할 것이란 계산을 갖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방소기간중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6·25전쟁과 83년의 KAL기 추락사건에 대한 언급을 하고,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부터 유감표명 정도의 외교적 반응을 얻어낼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행했던 과거의 양국 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뜻있는 일일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이번 방소는 우리나라 외교의 전방위시대를 한층 더 입증시켜줄 것이다. 지금까지 국제무대에서 들어야 했던 「미국의 피후견국」 또는 「미 일 한 삼각군사동맹의 전방초소」라는 이미지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탈이념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북방외교가 소련으로 하여금 한국을 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질서구축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한 것은 6공화국의 외교업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다만 일부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노 대통령이 내치의 실패를 커버하기 위해 외교업적만을 쫓다가 너무 성급한 대소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이 때문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없는지 등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연말에,그것도 정치·사회 안정을 이룩하겠다고 약속한 시한에 맞닥뜨려 외교관례상 예가 드문 연말 정상외교를 굳이 고집하는 것에 일부 국민의 의아심을 갖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노 대통령의 이번 방소가 국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예고하는 21세기의 좌표를 설정해줄 것이라는 것이 우리 당국자들의 판단이다.<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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