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한미군 눈·귀·입으로 44년…판문점 도끼 만행 생생히 기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62호 17면

31일 퇴임하는 김영규 공보관. 김상선 기자

31일 퇴임하는 김영규 공보관. 김상선 기자

입영 신체검사에서 두 번의 귀가 조치 후 서른 살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훈련소를 떠나며 무작위로 카투사에 차출될 때만 해도 주한미군과의 인연이 이토록 오래 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판문점을 1000번 이상 오가며 주한미군의 귀와 입으로 보낸 세월이 어느덧 44년. 그새 그에겐 ‘한·미동맹의 산증인’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오는 31일 퇴임을 앞둔 김영규(76)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얘기다. 지난 25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그는 “반세기 가까운 기간 매일 긴장감 속에 살았다”며 “여기서 해방된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

1976년 입대한 김 공보관은 동두천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된 뒤 사단 기관지 ‘인디언 헤드’ 기자로 군 생활을 보냈다. 근무를 시작한 직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지자 일촉즉발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고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며 혼혈아의 비참한 삶을 조명하는 기사를 써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대 3개월을 앞두고 주한미군 정식 직원으로 근무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그는 이때만 해도 ‘사회에 복귀할 때 영어 실력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겠거니’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이후 1985년 주한미군 공보실로 자리를 옮기며 지금의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40년 넘는 기간에 판문점을 가장 많이 방문한 한국인으로 꼽힌다.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유엔군사령부 공보관을 겸직하다 보니 내외신 취재 지원 등을 위해 일주일에 두 차례 판문점을 찾은 적도 있었다. 내게 판문점의 첫인상은 ‘대결의 장소’였다.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열리면 서로 악수도 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80년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교류의 장소’가 됐고 90년대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면서는 ‘화해의 장소’라는 성격이 더해졌다.”

이처럼 대결·교류·화해가 공존하던 판문점은 갈 때마다 새로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땐 건너편 북한군 표정에서도 활기가 느껴졌다. 반면 경색됐을 땐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양쪽 모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90년대 초 북한 기자가 ‘너희들은 경제적으로 앞서 있고 강력한 미군도 주둔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어할 게 없다’며 핵 개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에 나는 ‘우리 군사 시스템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런 점에서 판문점은 역사를 읽는 공간이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던 비결은 간단하다. ‘열정’을 품으면 된다. 열정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재미를 느껴야 하고, 재미를 느끼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

퇴임 후 주한미군 밖에서도 한·미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볼 생각이라는 그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