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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대통령,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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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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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국토부 장관, 서울시장과 직통 핫라인이 있는 여당 구청장이 꼭 필요하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5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말했다. 공개 모두발언에서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김태우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말이었다. 대통령·핫라인, 이 두 단어에 선거 전략이 담겼다. 도움이 됐을까? 회의적이다. 서울시민 대통령 지지율이 30% 중반이다. 여론조사에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0%에 육박한다. 대통령과 가깝다는 게 득표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 유권자가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나?’라는 인식을 갖게 할 위험도 있다.

여당이 ‘대통령 핫라인 후보’ 자랑
청년층 극혐하는 ‘지인 찬스’ 고백
클린턴은 첫 대면 긴즈버그를 발탁

대통령 지지 여부를 떠나 타산적 접근을 할 수는 있다. 지역 현안 해결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다. 김 대표가 핫라인을 언급하기 전에 ‘고도제한 완화’를 말했다. 강서구 숙원이다. 김포공항 때문에 생긴 일이다. 대통령이 해결할 수 있을까? 권력자 의지로 풀 수 있는 것이면 과거 대통령·서울시장·강서구청장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유권자가 안다. 건축물 고도제한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고, 정해진 기준을 바꾸려면 위험성·환경영향 등을 다시 따져보고, 도시계획 전문가 회의도 거쳐야 한다. 강서구 고도제한 완화 앞에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안전 기준이라는 장벽이 있다. 이게 바뀌어야 국토부가 나설 수 있다.

김태우 후보는 대통령이 사면·복권해 줘 출마할 수 있었다. 대법원 확정판결로부터 석 달 뒤에 사면이 이뤄졌다. 검찰 수사관 출신인 그에게 대통령과의 친분이 있다는 것은 여당 대표가 ‘핫라인’을 말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안다. 사면과 출마에 대통령 권력이 작용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 말로 ‘지인 찬스’다. 청년들이 혐오하는 불공정 채용·승진 요인이다.

“느그 서장이랑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다 했어.” 영화 속 명대사다. 친구가 대통령 자리까지 물려받은 198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범죄와의 전쟁’)에선 높은 사람과의 친분 과시가 먹혔다. 김태우 후보가 직접 대통령과의 관계를 자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거를 도우러 간 국민의힘 정치인은 그가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전략이 지극히 꼰대스러웠다. 요즘은 촌에서도 통하지 않을 구시대 선거운동이다. 그것에 당 대표가 앞장섰다. 그는 한때 지인 찬스 피해자였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도운 대통령 측근 경쟁자 때문에 울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표적 수사도 받았다. 그런 그가 ‘대통령 핫라인’을  말했다.

낙마한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는 지난해 10월 대전고법 국정감사 때 대통령과의 관계를 묻는 야당 의원에게 “제 친한 친구의 친구로 친하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남부지법원장, 대전고법원장을 역임했다. 대법원장 후보 자격을 갖췄다. 그러나 시민은 국가권력의 3대 영역 중 두 개(행정·사법)를 ‘친하다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이 관장하는 나라를 바라지 않았다. 드러난 후보자 흠결은 경계심을 키웠다. 여소야대 국회를 뚫을 명분이 없었다.

1993년 6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뜰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판사를 옆에 두고 회견을 했다. 연방대법관 후보 지명 발표였다. 클린턴은 9분52초 동안 긴즈버그를 선택한 이유를 친절히 설명했다. 40명의 후보가 있었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그를 골랐다고 했다. 몇몇 후보의 실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훗날 클린턴은 “대법관 후보 검증을 위한 인터뷰에서 15분 만에 모든 면에서의 훌륭함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대화였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됐고, 클린턴의 업적에 긴즈버그 발탁이 꼽힌다. 대통령은 그가 고른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국민이 선택 과정과 결과를 냉정히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