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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싸구려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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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지난주 워싱턴 주미 대만대표부가 주최한 건국기념일 행사를 다녀왔다. 공원만큼 넓은 마당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트윈 오크스, 쌍상원(雙橡園)이라 불리는 고택에서 행사가 열렸다. 1937년부터 40년간 중화민국의 대사관저였지만, 미국과 국교 단절 후 내려진 대만 국기가 다시 걸린 지는 채 10년도 안 됐다.

이날 초대된 미 의회와 각국 대사관 인사들 앞에 선 샤오메이친 대표의 연설은 사뭇 비장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를 둘러싼) 위협과 괴롭힘은 더 커졌다. 우리는 굴복도 않겠지만 도발도 않을 것이다. 대만이 안정돼야 국제사회도 안정된다.”

이어 연단에 오른 마이클 매컬 하원 외교위원장은 화답하듯 “대만을 보호하는 게 미 국가 안보와 경제이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대만을 사랑한다”는 말도 영어와 중국어로 번갈아 외쳤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트윈 오크스’에서 열린 주미 대만대표부의 건국기념일 행사. 김필규 특파원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트윈 오크스’에서 열린 주미 대만대표부의 건국기념일 행사. 김필규 특파원

이런 제스처가 유독 과장되게 느껴진 것은 바로 직전 미 의회에서 일어난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파 등쌀에 임시예산안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부분은 쏙 빠졌고, 미국 서열 3위인 하원의장도 물러났다. 고립주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뉴욕타임스 표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지원 반대는 “공화당의 표준”이 됐다. 이제 대통령이 아무리 “중단 없는 지원”을 강조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다.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한 대만계 인사는 이런 일이 “대만인의 믿음을 흔들어놨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을 쳐들어와도 초반만 잘 버티면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봤는데, 애물단지처럼 된 우크라이나가 생각을 바꿔놨다는 것이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이를 두고 “말은 싸구려일 뿐(Talk is cheap)”이라고 냉소적으로 분석했다. “지금은 초당파적으로 중국에 적대감을 표하고 있지만, 의회가 엉망인 상황에서 대만은 몇 가지 보장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더글러스 팔 전 대만 미국대표부 대표)는 조언도 전했다.

한·미 간에도 정상회담과 캠프 데이비드 회동을 통해 많은 선언문과 합의가 나왔다. 두 나라 모두 스스로 후한 평가를 하고 있지만, 당장 미 의회나 내년 대선 이후 백악관에선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지난 4일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가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 파병 여부를 묻는 말에 찬성 응답은 50%에 그쳤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63%였다. 말의 값을 너무 비싸게만 믿고 있다가는, 지금 대만이 느끼는 두려움은 언제든 우리 몫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