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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그들에게 조국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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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형은 공부를 잘했어요. 국립대 졸업 후 무역회사에 들어가려 했어요. 선배가 너라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형은 면접까지 봤는데, 떨어진 겁니다. 선배가 집에 찾아와 이유를 설명해줬는데, 역시 문제는 국적이었어요. 너는 오케이(OK)지만 국적이 안 된다고요. 형은 이후 반 년간 행방불명이었어요. 그 뒤에 돌아왔지만요.”

간절히 바라던 취업. 그 낙방이 나의 능력이 아닌 나의 조국 때문이라면 어떻겠는가. 어디 요즘 시절에 있을 법한 일이냐고 하겠지만, 이 상처는 사실, 현재 진행형이다. ‘자이니치(在日)’로 불리는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 얘기다. 김태영 도요(東洋)대 교수(사회학·60)는 지난 8일 자이니치의 역사가 100년을 넘기며 일본 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고난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자살이다.

지난 6월 출범한 재외동포청 이기철 청장에게 현판을 전달하는 윤석열 대통령.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 6월 출범한 재외동포청 이기철 청장에게 현판을 전달하는 윤석열 대통령.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일본 내 한국과 조선적 국적의 자살자가 일본인보다 높아요. 한국의 자살률과 비교해도 높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김 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자이니치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 때문이었다. 오사카에서도 자이니치들이 몰려 사는 이쿠노구에서 오랜 시간 열려온 축제를 열정적으로 이끌어오던 사람들이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자살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왔던 1세들과 달리 2세들의 경우가 많았다.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대사관도, 동포들이 중심이 된 민간단체에도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자살 방지를 위해 일본 사회엔 ‘생명의 전화’가 있지만,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자이니치들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고민하던 그는 자조 모임을 만들었다. 이메일을 만들고 온라인 모임을 하기 시작했다. 10명 남짓의 남녀가 온라인으로 만나 한 달에 한 번,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물었다. “나라라는 것, 조국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절망적인 환경을 살아낸 자이니치들은 자이니치 증후군이라고 불릴 정도의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자이니치 현실을 이해하고, 조국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무엇이라는 메시지를 좀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재외동포청이 지난 6월 출범했다. 지난 5일 한인의 날 행사에서 윤 대통령은 일본에 있는 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 기증으로 만들어졌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750만 동포가 함께 힘을 모아 뛸 수 있는 운동장을 넓혀나가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젠 정말 조국이 답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