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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으로 떼돈 버는 이 나라…'러 제재 도피처' 호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 국적 유조선이 지난해 4월 그리스 중부 에비아섬 인근 카리스토스 해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국적 유조선이 지난해 4월 그리스 중부 에비아섬 인근 카리스토스 해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1년 7개월이 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한편, 러시아에 대해 무역과 금융 거래를 끊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용해 뜻하지 않았던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챙기는 나라가 생겼다.

그리스가 대표적이다. 그리스는 전쟁 과정에서 자국의 핵심 산업인 해운·선박업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그리스가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를 외면한 채 자국 유조선을 대대적으로 판매하면서 경제적 호황을 맛보고 있다”고 전했다.

통상 전문 매체인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 12개월간 그리스는 유조선과 운반선 등 약 125척을 매각해 40억 달러(약 5조3000억원)를 벌어들였다. 지난 6월 그리스 매체 헬레닉 시핑뉴스는 그리스 기업들이 올해 들어 유조선 97척을 팔아넘기며 전 세계 판매량의 25%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컨설팅 업체 베셀밸류에 따르면 그리스가 2022년 1월부터 지난 8월까지 유조선 판매로 총 24억7145만 달러(약 3조3488억원)를 벌어들여 노르웨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신원 미상’ 기업에 불티나게 팔려

지난 6월 그리스 아테네 피레우스항에 대형 컨테이너 선이 정박해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6월 그리스 아테네 피레우스항에 대형 컨테이너 선이 정박해 있다. 신화=연합뉴스

그리스가 뜬 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보유한 그리스의 중고 유조선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선박 구매자들은 기존 가격에 웃돈까지 얹어가며 유조선을 확보하려 위해 열을 올리지만, 이들의 신원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고 있다. FP가 최근 판매된 그리스 선박 20여척을 추적한 결과 이들은 대부분 주소조차 등록되지 않은 소재가 불분명한 기업의 소유가 됐다.

FP는 “이들 기업은 러시아의 원유 수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의심된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후 대러시아 제재의 영향권 밖에 있는 중고 유조선에 대한 러시아발 수요가 높아지면서 그리스 선박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신분이 불투명한 구매자에 팔려나간 그리스 유조선들은 보험 등 각종 제도권 서비스에 가입되지 않은 ‘그림자 함대’로 활동하며 서방의 제재를 벗어나고 있다. 그리스가 판매하는 유조선·화물선이 대러 제재 도피처가 된 셈이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FP “그리스, 우크라이나 평화 대신 돈 택해”  

서방의 제재가 강화하면서 러시아 석유 수송의 상당수도 그리스 선박이 담당하고 있다. 로빈 브룩스 국제금융협회(IIF) 이코노미스트는 “그리스 선박이 현재 러시아 항구에서 출발하는 유조선 용량의 5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며 “전쟁 발발 이전과 비교해 33% 늘어난 수준”이라고 말했다. FP는 “그리스의 행위가 불법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리스 선주들은 러시아의 석유 수출을 제한해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역할을 하기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을 택했다”고 비판했다.

“UAE, 스위스 제치고 오일 허브 부상 ”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도 서방의 대러 제재를 자국 산업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다. UAE의 두바이는 최근 스위스 제네바를 대신해 러시아산 석유의 최대 교역지로 떠오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같은 비서방 국가의 석유 거래가 제네바에서 이뤄졌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립국인 스위스가 EU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면서 그 자리를 두바이가 대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15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항에 UAE 국기가 걸려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15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항에 UAE 국기가 걸려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세관에 따르면 올해 1~4월 UAE에 소재한 무역 회사들이 러시아산 석유를 최소 3900만t 사들였다. 170억 달러(약 21조5000억원)가 넘는 규모로, 이 기간 러시아 세관에 신고된 수출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UAE 최대 원유 저장 탱크가 들어서 있는 동부 항구 도시 푸자이라로 유입된 러시아산 원유는 지난해 12월 하루당 14만1000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6월까지 평균 유입량은 하루당 10만5000배럴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 중 10%만 UAE로 수입됐고, 나머지 90%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지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이러한 거래를 주도한 무역회사들의 본사는 대부분 두바이에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자유무역지대인 두바이멀티원자재센터(DMCC)엔 소유주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무역 회사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들이 주로 러시아산 석유의 구매와 판매를 담당하고 있다”며 “원유 거래상들에게 두바이는 새로운 제네바가 됐다”고 평가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로이터통신도 “익명의 무역업자들이 두바이 등에 자리를 잡고 러시아산 석유를 유통해 인도와 중국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FT는 “서방의 대러 제재에 협조하지 않는 UAE는 전쟁을 계기로 글로벌 ‘오일 허브’ 지위를 노리고 있다”며 “러시아 특수가 끝나더라도 UAE의 인프라를 높게 평가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로 인해 UAE의 입지는 쪼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 상한제에도…러, 고유가 ‘반사이익’

러시아 국기와 천연가스 파이프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국기와 천연가스 파이프를 합성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제재 당사국인 러시아도 서방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있다. FT는 “러시아가 서방이 지난해 12월부터 시행한‘원유 가격 상한제’를 대부분 무력화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원유 가격 상한제는 러시아산 원유를 배럴당 60달러보다 비싸게 거래할 경우 서방이 제공하는 운송과 보험 등 해상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제재를 말한다.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 베네수엘라 등과 거래하거나 아예 소속이 불분명한 선박인 ‘그림자 선단’을 활용해 서방의 제재 속에서도 석유 수출을 이어왔다. 실제로 FT에 따르면 지난 8월 러시아의 모든 해상 원유 운송의 75%가 서방 기업들의 보험 없이 이뤄졌다.

오히려 최근엔 국제 유가가 100달러 선을 위협할 정도로 급등하면서 60달러 이하인 러시아 석유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경제대학(KSE)은 “지난 7월 이후 원유 가격이 꾸준히 상승한 것과 러시아의 원유가격 상한제 회피 덕에 러시아의 올해 원유 수출 수입이 예년보다 최소 150억 달러(약 20조475억원)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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