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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센인과 43년, 맨손으로 보듬었다…소록도 천사 할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마가렛 피사렉

마가렛 피사렉

‘한센인의 어머니’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의 선종 소식에 추모 물결이 일고 있다. 마가렛은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평생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해온 인물이다. 지난달 29일 고향인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한 병원에서 골절 수술 중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88세.

소록도성당은 2일 오전 7시30분쯤 한센인 60여 명과 함께 고인을 위한 연도(煉禱·위령기도)를 올리고 묵주기도를 진행했다. 고령 한센인들은 마가렛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고 한다.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봐온 ‘푸른 눈의 소록도 천사’ 마가렛 피사렉(왼쪽)과 마리안느 스퇴거 간호사. [연합뉴스]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봐온 ‘푸른 눈의 소록도 천사’ 마가렛 피사렉(왼쪽)과 마리안느 스퇴거 간호사. [연합뉴스]

이 성당은 마가렛과 그의 동료 마리안느 스퇴거(89) 두 간호사가 구호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온 1962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고지선(마리안느), 백수선(마가렛)이라는 한국 이름도 가진 이들은 2016년 대한민국 명예국민으로 선정됐으며 대한간호협회 명예 회원이다.

과거 소록도에 격리 수용된 한센인들의 처지는 열악했다. 치료약은 물론 의식주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파란 눈’의 두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건네고 주치약을 투약했다. 짓무른 환자들의 손발 소독도 맡았다. 맨손으로 자신들을 치료하는 것에 감명받은 한센인들이 그녀를 ‘수녀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렀지만 마가렛은 ‘할매’라는 친근한 애칭을 더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록도 밖으로 강제 퇴원된 이들에겐 주변에 도움을 청해 정착금도 마련해줬다. 소록도 내 한센인 치료를 위한 결핵이나 맹인 병동, 소아병원인 영아원 등을 짓는 데도 힘을 보탰다. ‘한센인의 어머니’ ‘소록도 천사’로 평가받았다.

마가렛과 마리안느는 소록도 파견 당시 공식 근무 기간은 5년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록도에 남아 2005년까지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한센인들을 돌봤다. 건강이 허락지 않아 2005년 11월 섬을 떠날 땐 “부담 주기 싫다”며 편지 한 통만 남겨둔 채 조용히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소록도에서 근무하던 마가렛과 마리안느 간호사. [연합뉴스]

소록도에서 근무하던 마가렛과 마리안느 간호사. [연합뉴스]

소록도성당 주임 신부였던 김연준 신부는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설립하고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윤세영 감독)을 제작했다. 김 신부는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이사진이 명절 인사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가 마가렛의 부음을 접했다”며 “고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사회를 위해 시신을 대학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겠다고 하셔서 장례 절차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동료 마리안느는 마가렛이 세상을 떠난 것이 서운하면서도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게 된 그가 부럽다고 했다고 한다.

소록도로 향하는 길목 격인 고흥군 도양읍엔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눔연수원’이 있다. 두 간호사의 희생정신을 기리려 2019년 지었다. 전시관과 강의실·생활관·식당 등을 갖췄는데 추석 명절 연휴 연수원을 찾는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소록도성당은 마가렛 간호사를 기리려 10월 한 달을 추모 기간으로 정했다. 마가렛과 소록도를 이어준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4일 광주 임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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