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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왜 해요?" 예식장 아닌 극장에서 화촉 밝힌 커플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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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배일(오른쪽), 황남임 부부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 두 사람이 혼인에 이르는 과정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박배일(오른쪽), 황남임 부부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 두 사람이 혼인에 이르는 과정을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혼인식을 치르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가장 먼저 ‘결혼식’(結婚式)이란 말이 남성이 장가간다는 뜻이란 걸 알게 돼서 ‘혼인식(婚姻式)’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의심하면서 배우고 실천하는 혼인생활을 하겠습니다….”(박배일 감독)
다큐멘터리 감독 박배일(42), 초등학교 교사 황남임(31)씨 부부는 지난해 9월 24일 예식장이 아닌 극장에서 화촉을 밝혔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걷는 결혼식 대신 혼인 과정의 고민과 경험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 부모‧가족‧친지 앞에 상영했다. 신부 황 감독은 당시 하객에게 “빛나는 환상으로 포장된 혼인보다 저희 삶과 사랑이 배인 혼인식을 하기로 했다”고 계기를 밝혔다.
부부가 공동 설립한 제작사 나하나필름의 첫 작품이다. 연출‧촬영‧구성‧편집도 모두 두 사람이 함께했다. 많게는 수억이 오가는 화려한 결혼식과 180도 다른 선택이다. 영상 세대의 새로운 혼인 풍속도를 그렸다.

DMZ다큐영화제 화제작 '어푸 어푸' #가난한 다큐 감독, 교사의 사랑 찾기 #집안 반대, 유년기 트라우마 고백 #영화제 상영서 결혼 1주년 초심 되새겨

결혼 왜 할까? 이 부부가 찾은 답

지난달 폐막한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다큐 ‘어푸 어푸’는 부부가 이 영화의 제작을 결심하고부터 혼인식 상영 뒤까지를 담은 작품. 가난한 독립 다큐 감독이 교사란 안정된 직업에 나이 차까지 큰 여자친구를 만나, 여자친구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혼인에 이르기까지를 본인 및 주변인들의 솔직한 인터뷰로 그려냈다.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에서 부부 감독이 촬영 장면을 편집하며 말다툼하고 있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에서 부부 감독이 촬영 장면을 편집하며 말다툼하고 있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코로나19로 미뤄진 결혼식 수요가 폭발하긴커녕 지난해 혼인 건수가 역대 최저치(19만1700건, 올 3월 통계청 발표)를 기록한 요즘, 시집살이, 자녀 양육부담 등 결혼의 의무를 더 무겁게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조금은 다른 각도의 부부관을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2018년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자원활동가로 참여한 황 감독을 만나 진심 어린 편지로 구애에 성공했지만, 두 사람의 연애는 단맛만큼이나 쓴맛이 컸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한 환경에서 성장해, ‘밀양 아리랑’(2014), ‘소성리’(2017) 등 여성‧노인‧장애‧지역공동체를 주제로 한 독립 다큐를 만들어온 박 감독과 부모가 원하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자란 황 감독. 다큐엔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의 가치관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황 감독은 사회 초년생 때 부당한 일을 당하고 불안정한 연애를 겪으며 후 자해 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엉뚱한 친구로 통할 만큼 혼자서 훌쩍 오지 여행을 감행해도 막힌 가슴은 잘 뚫리지 않았다.
“인터뷰하다 보면 가족들한테, 연인한테 받은 상처가 엄청 큰 것 같은데 우리 왜 결혼하려고 그래요?” 다큐 전체가 박 감독이 스스로 던지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혼인, 누군가에겐 자유 쟁취 여정일 수도"

다큐에서 황 감독은 감춰온 자신의 속내를 들춰내는 것을 곤욕스러워한다. 박 감독의 ‘어푸 어푸’ 제작 후기에 따르면 “‘짝꿍’(그는 아내를 이렇게 불렀다)이 영화 만들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찍지 마요!’였다”고 한다. 촬영 거부에, 우는 모습을 빼달라는 요구까지 겹치자 박 감독도 “협업하는 건 (이 작품이) 끝이다.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작업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 했던가.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멀찍이 튕겨 나간 상대에게 ‘어푸 어푸’ 헤엄치듯 다가가는 화해의 과정은 서로를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터준다. 아내로 인해 박 감독은 부동산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하고, 남편으로 인해 황 감독은 삶의 고민을 담은 단편영화 만들기에 도전한다. "신부가 아깝다"던 세간의 일방적인 생각도 바뀌어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에서 '우리'의 세계로 확장하고 변화한다.

지난달 19일 박배일 감독이 제15회 DMZ다큐국제영화제가 열린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메가박스 백석벨라시타 영화관에서 다큐 '어푸 어푸'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 DMZ국제다큐영화제

지난달 19일 박배일 감독이 제15회 DMZ다큐국제영화제가 열린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메가박스 백석벨라시타 영화관에서 다큐 '어푸 어푸'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 DMZ국제다큐영화제

“나는 오빠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게 단단해 보였다”는 아내의 고백에 남편은 자신과 다른 삶에 물드느라 지쳐있던 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인다. “내 선택을 부정하는 주변의 말이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남임이가 욕망했던 내가 계속 흐려지고 있다”면서다. 아내는 가만히 답한다. “괜찮다. 나를 옥좼던 모든 걸 벗고 오빠에게 가겠다. 새로운 오빠를 발견하고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할 거”라고 말이다.
“억압으로만 생각했던 혼인이 누군가에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여정일 수도 있단 걸 영화를 보며 느꼈다.”
 박 감독은 최근 SNS에 동료 감독의 이런 감상평을 전했다. 결혼 1주년을 맞은 황남임‧박배일 감독에게도 올해 DMZ 영화제 상영이 ‘초심’을 되새기는 시간이 됐단다. 박 감독은 “자신이 살아온 '쪼(특유의 습관)' 때문에 때때로 서로를 구속하려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각자 안에 배어있는 가부장제의 상흔을 돌아보고 그와 맞서려고 애쓰고 있다”면서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자유를 향해 어푸어푸 헤엄쳐 가고 있다”고 전했다.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에는 두 사람의 신혼여행 모습도 담겼다. 다른 생각으로 인한 다툼이 새로운 이해의 길을 터주면서 부부의 관계도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다큐멘터리 '어푸 어푸'에는 두 사람의 신혼여행 모습도 담겼다. 다른 생각으로 인한 다툼이 새로운 이해의 길을 터주면서 부부의 관계도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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