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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검열하던 그 시절…‘세기의 걸작’ 운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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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오른쪽)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아래 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오른쪽)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아래 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구레나룻이 턱까지 내려온 배우의 과장된 억양이 옛 충무로 방화를 떠올린다. 흑백화면의 명암 대비를 위해 오래전 사라진 텅스텐 조명기도 돌아왔다. 지난해 3~6월 촬영한 김지운 감독의 열 번째 장편 ‘거미집’ 현장 풍경이다. 1970년대 엄혹한 검열 속에서 동명 영화의 결말을 단 이틀 만에 다시 찍으려는 중견 감독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 ‘거미집’이 추석 연휴를 앞둔 27일 개봉한다. 김 감독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부터 함께한 배우 송강호가 주인공 김열을 맡았다.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위 사진)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위 사진)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주인공은 주목받은 데뷔작 이후 변변찮은 감독으로 전락한 김열. 이미 촬영을 마친 신작 ‘거미집’을 걸작으로 만들 새 결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극 중 그의 영화 ‘거미집’은 방직공장 집에 시집간 신여성(임수정)이 고부 갈등과 남편(오정세)의 무능, 후처(정수정)의 탐욕으로 인해 비통한 최후를 맞는 내용. 김열은 순애보적 비극을 투쟁적 결말로 바꾸려 한다. 유신정권에 짓밟힌 창작욕의 표출이기도 하다. 재촬영이 귀찮은 제작자(장영남), 스타 주연들의 몰이해, 검열기관의 훼방을 돌파하는 과정이 ‘조용한 가족’ 풍 블랙코미디로 펼쳐진다면, 영화 속 영화에는 불온한 전복의 기운이 가득하다.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위 사진)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감독 김열(송강호·위 사진)은 신작의 시대 순응적 결말을 다시 찍고 싶지만, 배우들(사진)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왜 1970년대를 돌아봤을까. 김지운 감독은 지난 14일 언론 시사 후 간담회에서 “1960~70년대 한국 지식인·예술가·영화감독의 룩을 좋아한다. 그런 예술가의 초상을 만들고자 했다”며 “팬데믹 이후 한국영화 위축 속에서 영화는 무엇인가, 다시 의미를 묻게 됐고 이를 관객한테 보여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만희·김기영·유현목·김수용·하길종 등 당대 활동한 선배 감독을 언급했다. 영화에도 당대 감독들을 떠오르게 하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출연 배우 중 유일하게 그 시절 활동한 박정수는 “70년대에는 드라마 현장에도 중앙정보부가 나와 직접 검열했다”고 돌이켰다.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기를 지나 70년대 침체에 빠졌다. 『한국 영화 역사』에 따르면, TV 보급, 가혹한 검열, 국책 영화 양산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영상자료원(영자원)이 2016년 공개한 1960~70년대 영화 검열서류 2000여 건 중엔 유명 작품에 관한 것도 많다. 60년대 ‘7인의 여포로’를 찍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됐던 이만희 감독은 73년 국방부 지원작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반전에 초점 맞춰 만들었다가 또 곤욕을 치렀다. 김기영 감독의 ‘미녀 홍낭자’(1969)는 미신 조장을 이유로 장면 62곳을 삭제하거나 변경한 뒤에야 검열을 통과했다.

김지운

김지운

이 무렵에는 성룡의 ‘취권’ 등 홍콩 무술영화, ‘닥터 지바고’ ‘대부’ ‘벤허’ 등 해외 대작의 공세도 거셌다. 1969년 1억7300만명이던 영화 관객 수는 76년 7000만명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30%로 줄었다. 김지운 감독은 당대 이런 불황의 돌파구를 “구태의연한 것, 자신의 어떤 세계를 뒤집어보고 새로운 걸 찾아내려는 김열 감독(창작자)의 욕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를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 상징적으로 새겼다.

1970년대 영화 풍을 되살린 촬영·미술도 볼거리다. 김지용 촬영감독(‘달콤한 인생’ ‘남한산성’ ‘헤어질 결심’), 정이진 미술감독(‘택시운전사’ ‘마약왕’)이 맡았다. 제작 과정이 당대 한국영화 수준을 재인식하는 계기도 됐단다. 신상옥·김기영·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정 미술감독은 “70년대 표현 기법은 현대 영화보다 독창적이고 기괴하게도 보였다”며 “컴퓨터그래픽(CG)이 없어서 오히려 수작업이 정교하고, 허용되는 표현 기법이 많게 느껴졌다”고 했다. 방직공장과 거미를 연결한 이미지가 한 사례다.

이미 컬러 영화가 주류인 1970년대이지만, ‘거미집’은 일부러 흑백을 택했다. 김 촬영감독은 참고한 작품으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 미국 누아르 영화 ‘사냥꾼의 밤’(1955)을 꼽으며 “‘거미집’은 그림자가 강한 표현주의적 조명, 과장된 프레이밍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한국영화를 찾아보다 ‘하녀’ ‘삼포 가는 길’(1975)을 촬영한 김덕진 촬영감독의 영화 ‘고려장’(1963)을 처음 접하고 외국 작품에 뒤지지 않는 기술적 완성도에 놀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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